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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 최 항 : 몽골의 5차 침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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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항

 창기의 자식이었다고 한다.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하는 얼자 중의 차남으로

한 술 더 떴던 형과 함께 어려서부터 애비 속을 징그럽게 썩여 강제 출가를 당하기도 하였다.

중노릇을 할 때에도 백성들을 못살게 굴어 지방관들을 어지간히 열 받게 하였는데,

뒈질 때가 된 최 우가 그래도 지 핏줄이라고 강도로 불러들여 벼슬을 주었다.

최 항은 유력한 후계자였던 최 우의 사위 김약선이 무고로 처형당하자 졸지에 후계자가 되었는데, 

김약선의 마누라 최송이는 노비와 간통을 하다가 발각되자 남편을 반역죄로 무고했다고 한다.  최송이와 그녀의 노비 연인은 나중에 실상을 알게 된 최 우가 죽여 버렸고.

얼떨결에 후계자가 된 최 항은 김 준과 더불어 삼별초의 또 다른 실세 최양백을 끌어 들여 권력기반을 구축하였다.

 1249년 집권하였으나, 그의 입지는 애비에 비해 매우 취약하였다.

천출이라는 태생적 요인 이외에도, 그간의 행적으로 인간성이나 자질 또한 형편 없다는 것이 입증되었고, 억울하게 죽은 김약선에 대한 동정론 등이 결부되어 제대로 된 지도자 대접을 받기 어려웠다. 애비가 죽은 지 이틀 만에 상복을 벗고 애비의 애첩을 취하는 패륜을 저질러 악평에 기름을 붓기도 하였고.

최 항이 지가 처한 상황을 알았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집권 초기에는 나름대로 선정을 베풀어 인심을 모으고자 노력하였다.

하지만 어느 정도 자리가 잡히자 본색을 드러내어, 중질할 때 원한을 맺었던 지방관들을 귀양 보냈으며, 반란에 대한 고변만 있어도 아무런 조사 없이 바로 강물에 던져 물고기 밥이 되게 하였다.

고종의 출륙을 막았고, 계모 대씨와 그녀의 전남편 아들을 죽였고,

김약선의 동생이자 1차 여몽전쟁의 영웅 김경손도 죽였다.

그 외에도 외숙부를 포함한 다수를 단순히 고변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물에 빠뜨려 죽였는데, 사실 이들은 최가의 권력기반을 이루던 사람들로 스스로 자신의 기반을 파괴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한편 몽골에서는 후계분쟁을 마무리한 몽케가 즉위하자마자 고려에 출륙 환도 및 고종의 친조를 요구하였는데,

창기의 자식이 권력을 이었으므로, 애비의 정책을 버릴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지 애비나 마찬 가지로, 완전 항복 이후에도 권력을 유지할 자신이 없었던 최 항은 몽케의 요구를 이런저런 사기로 피해갈 수밖에 없었다.


 인내가 바닥난 몽골은 1253, 대거 침입을 개시 하였다. 대장은 예케.

최 항은 지 애비처럼 강화도에서 웅크리고 앉아 꼼짝도 안했고, 고려는 또 다시 겁탈을 당하였다.

철원, 춘천, 양평, 양양을 휩쓸며 대대적인 남진을 하던 몽골군은 충주성에 도달하였는데, 이때 예케가 갑자기 병이나 귀국하게 되었다.

그리고 충주성에는 살리타이의 모가지를 꿰뚤어 버린 김윤후가 환속하여 방호별감으로 재직 중이었다.

김윤후는 정규군이 아닌 노비승려백성들을 이끌고 70여일을 끌었는데,

군량이 떨어지고 사기가 저하되자 관청에 보관된 노비문서를 불사르고 몽골군에게서 빼앗은 소와 말 등을 사람들에게 나눠줘 전투의지를 끌어 올렸다고 한다.

몽골군은 황당했을 것이다. 총사령관은 없고. 

이래저래 답답했던 몽골은 고종이 출륙하여 사신을 친견하는 성의를 보이고왕자를 입조시겠다고 하니, 못 이기는 척 일단 철수하였고, 안경공 창이 볼모로 입조하자 완전히 철군하였다.


 충주성 전투는 몽골의 침입을 물리친 몇 안 되는 승리이기도 하지만, 최가 정권의 실정으로 반감이 높았 사람들을 이끌고 승리하였다는 점에서 더 큰 의미가 있다전직 승려 김윤후의 친화력과 설득력이 발군이었던 모양이다.

충주는 국원경으로 승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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