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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에로니무스 (Jero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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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티누스의 공인 이래 역대 황제들의 전폭적인 후원에 힘 입은 기독교는 폭발적으로 세를 불리며 수많은 개종자들을 발생시켰는데,
종교집단의 속성상 신도의 수가 늘어나는 것보다 더 좋은 일은 없었을 것이나 그 대가가 만만치 않았다. 
세상에 좋기만 한 일은 없는 모양이다.

기독교는 원래 누구하나 손 내밀어 주는 이 없는 사회 밑바닥 인생들이 모여 서로 돕고 위로하며 살아가던 공동체에서 출발하였으므로 

그 구성원들은 대대로 축재, 사치, 낭비, 쾌락.. 등등과는 인연이 없었고 그저 예수에 대한 무조건적인 믿음과 더불어 공동체를 위한 헌신, 희생, 구성원들 간의 사랑 등이 강조되는 삶을 살아야 했는데,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로 성장하여 사회 상류층을 비롯한 각계각층의 사람들을 흡수하는 바람에 공동체의 덩치가 커지게 되면서 이전에는 상상하지도 못했던 수 많은 복잡한 문제들에 시달리게 되었다.

거대 공동체 내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은 수도 없이 많았을 것이나 이를 해결할 문화적 자원이 부족했던 기독교는 별 수 없이 이교의 문화를 차용할 수밖에 없었는데,

덕분에 빨간 옷을 입은 영감님이 한밤중에 썰매를 타고 돌아다니며 선물을 나누어 주는 횡재를 하기도 하였으나,

모든 것이 다 그렇게 긍정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어서 차용된 이교의 문화와 기존의 기독교 가치들과의 빈번한 충돌은  물론이고 

세련된 이교문화에 압도되는 경우도 있었을 것이다.

지엄한 국교가 남의 옷을 빌려 입고 화려한 파티에 나간 촌닭처럼 조소의 대상이 되어 버린 것인데, 

그 정도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차별성의 희석이 더 진행되어 경계조차 모호해져 버린다면 

뭐가 기독교고 이교인지 구별하기 어렵게 되는 상황이 올 수도 있는 일이었다.

이리 되면 ​ 국교의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되는 것은 물론 기독교를 지키기 위해 순교의 피를 뿌렸던 옛 선열들이 헛짓을 한 꼴이되므로

교계의 지도자들은 기독교의 정체성을  확보하기 위해 이교와의 차별성을 강화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신고의 세월을 살아오는 동안 강인한 생존능력은 배양되었을지 모르나축적된 교양철학문학지식 등이 빈약했던 기독교는

별 수 없이 초창기 공동체들이 뒷골목과 지하묘지를 전전할 때 선택의 여지 없이 받아들였던 삶의 방식인 금욕과 고행을 기독교의 가치로 내세우게 되었다.

그러나 사회의 비주류들이 모인 소규모 공동체에서나 작동하던 전통가치들이 거대 제국 내 모든 문제들의 마스터키가  될 수는 없었고,

교양 있고 수준 높은 개종자들을 대할 때는 특히 난처했을 터인데,

그래도 철학의 경우는 뜬구름 잡기는 매한가지인 신플라톤 학파의 사상을 이용하여 그럭저럭 때울 수 있었으나

그리스 로마 문명의 정수였던 문학 쪽은 사정이 달랐다.

당시 인간의 적나라한 감정을 아름답고 세련되게표현하는데 주력하던, 철없는 이교의 신들을 닮은 문학은 매력적이기는 하였으나 

이교의 가치들을 담뿍 담고 있었고 금욕은 커녕 쾌락 찬미가 주를 이루고 있었으므로 그대로 수용하기에는 무리가 많았다.

이 난제를 해결한 사람이 히에로니무스였는데,

로마의 출신의 뛰어난 문장가였다는 그는 그리스어와 히브리어에도 능통하였다 하는데

교황의 비서로 재직하며 일상의 쾌락조차 인정하지 않는 극도의 금욕을 설교하였고, 자신과 관점이 다른 이들에게 신랄한 독설을 날리기 일쑤였으므로

당대의 로마 사람들에게는 아주  재수 없는 인간이었을 것이다.

교황 사망 후 자발적 추방처럼 베들레헴으로 이주한 그는 여전히 재치 있는 독설을 취미로 삼으며 성서의 번역에 매진하였는데

그가 번역한 성서는 훗날 공통적으로 통용되는 성서라는 뜻의 불가타 성서라 불리웠으며 라틴어 저술가들에게  막대한 영향을 끼친 걸작이었다 한다.

기독교 문학의 비조가 된 것이다.

 

그리고 이 인기 없던 독설가는 성 히로니무스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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