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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

[드라마] 중국판 퍼시픽 《중국원정군(中國遠征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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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no_profile 마루밑다락방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5-10-31 11:01 조회4,08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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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12월 8일, 진주만 기습으로 태평양전쟁이 시작되고 일본군은 파죽지세로 말레이와 인도네시아, 필리핀, 미얀마로 진격합니다. 그나마 필리핀에서 맥아더의 미국-필리핀 연합군이 어느 정도 효과적인 지연 작전을 펼쳤을 뿐 그 이외의 지역에서는 변변한 저항 한번 해 보지 못한 채 연전연패의 연속이었습니다.

사실 이 부분에 대해 짚고 넘어가면 일본은 이미 독일과 추축동맹을 체결한데다 1941년 초부터 미국과 극심한 갈등을 빚는 등, 연합군의 입장에서 일본과의 전쟁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상 일본의 공격이 시작되자 미국과 영국, 네덜란드, 호주는 속수무책으로 무너져 내렸습니다. 이에 대한 가장 큰 책임은 루즈벨트와 마셜, 스팀슨 등 최고 참모들에게 돌려야 할 것입니다.

개전 가능성은 충분히 인정하면서도 필리핀, 괌, 웨이크 등 최일선에 대한 방어선을 전반적으로 강화하지도, 그렇다고 이 지역을 과감하게 포기하지도 않은 채 전략적으로 애매모호한 입장을 고수하면서 대비는 게을리하였습니다. 또한 태평양에서 연합군간의 상호 협력 체계를 구축하지도 않았으며 이른바 "오렌지 계획(War Plan Orange)"으로 불린 미국의 전쟁 계획은 20여년 전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특히 오렌지 계획에서 태평양함대는 가장 핵심적인 수단이었지만 일본 해군에 의해 파괴되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않았으며 어떠한 대비책도 없었습니다. 한마디로 미국은 19세기 이래 뿌리깊은 유색 인종에 대한 멸시감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일본의 군사역량과 모험심을 지나치게 과소평가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공격이 시작되자 태평양의 연합군은 패닉 상태에 빠진 채 전의를 상실하였고 태반이 싸우지도 않고 백기를 들었습니다.

이미 일본과 5년 째 전쟁 중이었던 중국은 일본의 팽창을 저지하는 훌륭한 동맹국이라는 점에서, 이들이 절실히 원하는 무기와 군수품을 대량으로 제공하여 공세로 전환할 수 있도록 도왔다면 전황은 또 어떻게 바뀌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루즈벨트는 당장의 국내 여론과 의회 내 고립주의자들에 지나치게 신경쓴 나머지, 플라잉 타이거스의 창설과 100여대의 구식 전투기를 우회적으로 지원한 것이 전부였고 진주만 기습 이후에도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분명 루즈벨트는 강력한 리더쉽과 추진력을 갖추어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위대한 정치가였지만 막상 국가 전략의 세부 방침에서는 우유부단하고 근시안적인 면이 있었습니다. 이 점이 제2차 세계대전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적이 단지 나치 독일에서 소련으로 바뀌었을 뿐, 냉전을 열게 한 후에도 여기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과 상황은 지난 6월에 출간된 에드워드 밀러의 《오렌지전쟁계획》이 훌륭한 참고가 될 것입니다.

말레이를 손쉽게 점령한 일본은 다음 목표로 영국령 미얀마를 노립니다. 중국 동부 해안과 프랑스령 인도차이나가 일본의 손에 넘어간 상황에서, 미얀마는 중국의 마지막 남은 대외 원조 통로였기에 미얀마를 점령한다면 중국은 완전히 외부로부터 고립될 판이었습니다. 서쪽은 티베트 고원이, 북쪽은 시베리아와 중앙아시아의 광대한 사막이 가로막고 있었고 철도도 없는데다 교통도 너무 불편하여 원조가 거의 불가능했습니다. 일본은 중립국이었던 태국을 협박하여 군사통행권을 획득하고 추축동맹에 강제로 가입시킨 다음 일본군 제15군이 1942년 1월 16일 본격적으로 미얀마를 침공합니다.

연합군은 중국-미얀마-인도를 묶어서 중국전구로 편성하고 장제스를 최고 사령관에 임명합니다. 또한 영국과 협의하여 미얀마를 공동으로 방위하는 <전면(滇緬, 윈난성-미얀마) 공동방어 협정>를 1941년 12월 23일 체결합니다. 하지만 이는 형식적일 뿐, 평소 중국인을 철저하게 멸시했던 처칠은 실질적인 협력을 거부하였습니다. 또한 그는 미얀마를 굳이 지킬 필요가 없다며 인도로 철수하라고 지시합니다. 이는 명백한 협정 위반이죠.

영국의 비협조 아래에서도 장제스는 미얀마 방위​를 돕기 위해 파병을 결정합니다. 이것이 중국 근대 사상 최초의 해외 파병인 중국 원정군이었습니다. 병력은 3개군 9개 사단 10만명에 달했고 중국군 유일의 기계화 보병사단인 제200사단과 신편 22사단, 신편 38사단 등 최정예 부대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처칠의 비협조로 이들은 적절한 시기에 들어가지 못한 채 시간을 허비해야 했고, 처칠은 일본군이 랭군까지 밀고 들어온 뒤에야 마지못해 중국군의 미얀마 진입을 허용했지만 이미 때는 너무 늦었습니다. 영국군은 전의를 상실한 채 싸우지도 않고 도주하고 있었고 일본의 후원을 받는 미얀마의 독립 세력들은 도처에서 봉기하고 있었습니다. 중국군은 익숙치 못한 기후와 정글과 싸우면서 식량과 연료도 부족한 상태에서도 나름대로 선전합니다.

1942년 3월 19일 미얀마 남부의 작은 마을 타웅우(Toungoo)에서 제200사단은 일본군 선발부대 1개 대대를 전멸시켜 첫 승리를 거두었고 30일까지 벌어진 전투에서 일본군 제55사단에게 큰 타격을 입히며 질서있게 퇴각하였습니다. 중국쪽 자료에 따르면, 12일에 걸친 전투에서 중국군 손실은 2천여명에 일본군의 사상자는 5천여명에 달했다고 하는데 과장된 느낌이기는 하나, 중국군이 상당히 선전했던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또한 신편 제38사단도 예난자웅(Yenangyaung)에서 일본군 제33사단에게 포위된 영국군 버마 제1군단을 구원하여 인도까지 성공적으로 철수하였습니다. 연합군 사령부와 서방 언론들도 태평양전쟁 초반 막강한 일본군의 공세 앞에 연전연패하는 상황에서 중국군이 가장 잘 싸웠다는 사실을 인정하였습니다.

하지만 제1차 미얀마 원정에서 중국은 전 병력의 70%를 상실하고 제200사단장 다이안란(戴安瀾)이 전사하는 큰 손실을 입었습니다. "귀환에 실패한 병사들의 유골이 길을 하얗게 뒤덮었다. 많은 곳을 글자 그대로 하얗게 뒤덮고 있었다." 현지에서 총지휘를 맡았던 스틸웰 역시 극소수의 참모들만 데리고 적의 추격을 피해 정글을 헤치며 인도로 후퇴했고 기자들 앞에서 "지옥에서의 탈출"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는 땅에 떨어진 자신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미얀마 탈환 작전을 추진하여 인도에서 중국군을 재편성한 후 1943년 10월부터 반격에 나섭니다. 하지만 일본군 제18사단의 저항에 막혀 지지부진하고 무다구치의 제15군이 인도 임팔을 침공하면서 상황이 역전되자, 장제스의 강력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윈난성 쿤밍에서 훈련중이던 중국군 제11집단군과 제20집단군 등 15개 사단을 미얀마로 투입합니다.

웨이리황이 지휘하는 제2차 중국원정군은 1944년 5월 11일 전서(滇西) 반격 작전을 발동하여 노강(怒江)을 건너 일본군 제2사단과 제49사단, 제56사단과 치열한 전투를 벌입니다. 결국 일본군의 방어선을 무너뜨리고 1945년 1월 27일 망우(芒友)에서 주인도 중국군(中國駐印軍, X군)과 중국원정군(Y군)이 만나면서 미얀마 전역에서 승리합니다.

미얀마 전역에서 일본군은 지형지물을 적절히 이용하여 방어전을 펼쳤으며 연합군은 우세한 전력으로도 고전을 면치 못했습니다. 일본이 미얀마를 정복하는데는 고작 3개월이 걸렸지만 연합군이 완전히 탈환하는데는 거의 2년이 걸렸습니다. 바꾸어 말해서 영국이 미국, 중국과 보다 적극적으로 협력하여 방어전을 펼쳤다면 미얀마 전역의 향방은 분명 달라졌을 것이며 중국 전선의 상황 또한 어떻게 바뀌었을지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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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원정군》은 2011년에 미얀마 작전 70주년 기념으로 중국에서 제작하여 장시TV에서 방영한 총 45편짜리 대하 전쟁 드라마입니다. 임시수도였던 충칭과 윈난성 남부 마을 텅총(騰沖), 미얀마를 무대로 1942년 처음 미얀마에 들어가는 시점부터 시작하여 1945년까지 태평양전쟁 중 가장 치열했던 전역 중의 하나였던 미얀마 전역을 중국인의 관점에서 재조명합니다. 주인공 한소공(황즈중 분)은 제200사단 상교(대령) 참모로, 그 외에도 장제스와 스틸웰과 같은 주요 인물들이 등장하며 미얀마 전역에서 벌어진 주요 역사적 전투를 다룹니다.

 

 

내용을 질질 끄는 듯한 느낌에다, 주인공의 일상과 멜로까지 다루다보니 다소 지루한 면이 없잖아 있지만 전투 장면은 밴드오브브라더스나 퍼시픽만큼은 아니라도 중국 드라마치고는 비교적 사실적이며 고증도 상당히 훌륭합니다. 또한 당시의 복잡하고 미묘한 정치적 상황이나 연합군의 알력 다툼에 대해서도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솔직히 우리의 고증 개무시에 엉터리 저예산 전쟁 드라마보다 훨씬 낫다는. 돈 아낀다고 아예 중요한 전투 장면을 스킵하는 것이 보통이고...--;;; 또는 전쟁을 가장한 멜로물이라거나. 

 

미얀마에 처음 들어온 중국군 병사들이 맨발에 짚신을 신고 있는 것을 영국군이 신기하게 쳐다보면서 자신들의 군화를 주지만 이들은 거들떠 보지도 않습니다. 평생 가죽 군화를 신어본 적이 없는 그들로서는 오히려 짚신이 편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폼은 나지 않지만. 사실 일본군도 청일전쟁에서 서구식의 가죽 군화를 보급하지만 발이 맞지 않아 심한 고생을 했고 이 때문에 일부 군의관들은 도로 짚신 시대로 돌아가야 한다는 주장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인도에서 재편되면서 중국군도 후반부에서는 독일제 철모 대신, 미군이나 영국군의 철모를 쓰고 짚신 대신 가죽 군화를 신고 싸웁니다. 철수하는 영국군과 교체하여 진지에 중국의 청천백일 깃발을 올리면서 조국을 대표하여 연합군의 일원으로 이역만리에 싸우러 왔다는 것을 자랑스러워 하는 모습, 영국군과 미군과의 갈등 등 어차피 남의 나라 역사인지라 우리에게 그대로 감정이입 되기는 어렵지만 꽤 재미있는 드라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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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중국 정부는 항일전쟁 승리 70주년 전승절에서 대대적인 행사를 하면서 팔로군만이 아니라 그동안 박해당했던 국민정부군 투항병 출신 노병들을 초청하고 롄잔 국민당 전총재가 개인자격으로 참석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양안의 해빙 무드와 중일전쟁에 대한 패러다임이 변화하면서 기존의 팔로군 중심 항일 투쟁만을 강조하고 국민정부군은 패주하기 급급했다는 식의 편향되고 일방적인 대륙 사관에서 점차 벗어나 국민정부군의 정면 항전을 재조명하고 객관적으로 평가하려는 추세입니다. 이런 분위기에서《중국원정군》은 그들에게는 의미있는 역사 드라마이며, 방영 당시 1980년대 이후의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높은 시청률을 누리기도 했습니다.

유튜브에서 검색하면 쉽게 찾을 수 있으니 관심 있는 분들은 보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이제 한 4편 정도 봤는데 45편을 언제 다 볼라나...

중국원정군 보기 

[https://youtu.be/N5pNMi3X9mI​]

[이 게시물은 마루밑다락방님에 의해 2019-09-19 11:11:59 세계사자료에서 이동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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