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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멸망과 부흥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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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멸망은 느닷없는 일이었다.

오랜 수, 당과 전쟁으로 국력이 거의 고갈되고, 연개소문 사후 지도층이 분열되어 망해가던 고구려와는 다르게, 

무왕과 의자왕의 개혁이 성공하여 당시 한반도 최강의 세력으로서 유세를 떨치고 있던 백제는, 

고구려, 백제, 왜를 잇는 종적 연대의 중심이었고, 당과 신라를 잇는 횡적 연대와 더불어 형성된 10자 외교 형성의 주도자로서,

멸망 직전까지 신라에게 공세를 퍼붓는 상황이었다.

이렇게 잘나가던 백제가 왜 그렇게 한 순간에 무너졌을까?

당이라는 당대 세계 최강국의 직접 침공이 원인이었을 것이다.

 



의자왕으로서는 고구려 때문에 당의 직접 침공은 어려울 것이라고 방심을 하였겠지만

고구려는 이미 늙은 대국이었고, 고구려 배후에 위치하는 신라의 전략적 가치는 당에게 아주 중요하였으므로,

신라도 구하고 고구려를 남쪽에서 공격하는 루트를 확보하기 위해 당은 백제를 침공하게 되었다.

당시 동원된 군사는 당군 13만, 신라 5만 도합 18만이었는데, 백제가 아무리 잘나가는 중이었다 해도 이정도 군세에는 역부족이었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처럼 의자왕이 충신의 말을 안 들어서 진 것이 아니었다.

의자왕의 전략과 전술은 당의 강력한 무력 앞에 모조리 무너졌고, 권력에서 소외되어 있던 지방세력은 방관하였으므로, 신라를 막는데 사용할 수 있는 병력은 계백의 5000 결사대 정도에 불과하였다.

계백의 처절한 저항이나 관창의 죽음 같은 감성을 자극하는 황산벌 싸움은 대세와는 별 관계가 없었고,

백강 전투에서의 패배가 결정적인 패망의 원인이었다.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군이 부여로 밀려들어오자 의자왕은 태자 효와 함께 옛 수도 공주로 피난하였고,

제2왕자인 태가 남아서 사비성을 고수하려 했으나 오래 지탱하지 못하였고, 1만여 명의 전사자를 내며 궤멸하였다.

나당군은 이어서 공주를 함락시켰고 의자왕과 태자 효도 660년 7월 마침내 투항하여 공식적으로 백제는 멸망하였다.

그러나 이는 중앙정부의 붕괴에 불과할 뿐 백제의 모든 것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수도가 함락되고 왕이 죽고, 백제 역사상 한두번 겪는 일이 아니지 않는가?

 

당나라는 사비성을 함락시킨 후 5 도독부를 설치하였으나,

일부 지역 외에는 통제력이 미치지 못하였고 곧 백제 부흥군이 전국을 장악하게 되었다.

백제 유민들의 부흥운동이 본격화된 것은 소정방의 주력부대가 8월말 사비성에서 물러난 뒤부터였다.

의자왕의 종형제인 왕족 복신과 승려 도침은 왜에 가 있던 왕자 부여풍의 귀국을 준비하면서, 주류성을 근거로 군사를 모으고 나당군에 대한 공격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왕조의 부흥을 선언한 이들에게 북서부의 많은 성들이 호응하였고, 복신은 이들을 결집시켜 사비성을 포위 공격하였다.

사비성에 주둔하던 유인원의 당군과 김인태의 신라군은 위기에 빠졌고 본국에 원병을 요청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디급해진 신라는 태종 무열왕이 친히 군사를 이끌고 와 위기를 타개하였다.

복신의 부흥군은 단독 공격이 어려워지자 임존성으로 후퇴하여 흑치상지군과 합세하였다.

흑치상지와 합류한 복신과 도침은 임존성에서 주류성으로 돌아와 백강 입구를 막아 당군의 상륙을 저지함과 동시에 사비성을 다시 공격하였다.

그러나 당군이 상륙함에 따라 부흥군은 다시 임존성으로 후퇴하여 전력을 정비하였고

일본으로부터 662년 왕으로 추대된 부여풍이 일본의 원병을 거느리고 도착함에 따라,  다시 적극적인 전투를 벌이게 되었다.

당시 당나라가 고구려 원정을 시도하여 신라로 하여금 군량을 공급하게 하였으므로,

부흥군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금강 동쪽으로 진격해서 신라의 북상로를 점령하고 사비성과 웅진성을 고립시켰다.

이에 당나라는 고구려 공격으로 바쁜 와중에도 구원부대를 파견해야 했다.

부흥군은 이렇게 기세가 강력하여, 당의 고구려 공략에 지장을 줄 정도였으나,

지도층의 내분으로 자멸하고 말았다.

복신이 도침을 죽이고, 부여풍이 또 복신을 죽이는 사건이 생겨버린 것이다.

나당 연합군은 이 기회를 포착하여 부흥군의 본거지인 주류성을 함락시킬 수 있었고,

부흥군 지도자들이 항복함에 따라 4년에 걸친 부흥 운동도 종말을 고하고 말았다.

 

그 강력했던 백제의 부흥운동이 내분으로 실패한 것은 매우 아쉬운 일이나

668년 이후에 당이라는 공동의 적에 대처하면서, 신라의 백제, 고구려 유민 결속정책에 따라,  한 민족으로서의 동일역사체 의식을 형성해 나감으로서

하나의 민족국가 형성의 기반이 마련되었다는 점은 민족사에 긍정적인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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