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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 제 23 대 고종 : 최 우 : 몽골의 1차 침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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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기스칸 사후 다음 대칸이 누가 될 것인가는 예민한 문제였는데,

소규모 떠돌이 양치기 생활에나 맞는 막내 상속을 제위에 적용하는 것은 누가 보아도 무리였고,

중국처럼 장자상속을 하려니 첫째 주치는 징기스칸의 씨가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이미 죽어 그 상속권이 아들인 바투에게 있었다.

그렇다고 혈통적으로 장자인 둘째가 잇자니 초원의 관습과 징기스칸의 정책에 정면으로 위배되었다.

대칸은 원래 두목들 전체 회의인 쿠릴타이에서 선출되는 것이고 징기스칸의 유지도 그러하므로,

옛날처럼 서로 치고받아 가장 쎈 놈을 가릴 수도 있었을 것이나.

사방에 적이 널려있는 신생국 주제에 그런 짓을 했다가는 나라가 결딴날 것이 뻔하였으므로,

징기스칸 사후 2년이 넘도록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며 시간만 끌게 되었다.

이 때 몽골이 쪼개졌으면 금은 몰라도 남송이나 고려는 그럭저럭 살아남을 수도 있었을지 모르는데,

안타깝게도 그들은 치열한 이합집산을 거쳐 세째를 조정자로 선택하였다.

 

1229년 쿠릴타이에서 합의에 의해 대칸으로 선출 된 오고타이에게 가장 시급한 문제는,

개봉으로 천도한 금나라의 명줄을 완전히 끊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만주에는 고려보다 더 열받게 하는 동진국이 건재하였고, 금나라도 황하 이남의 경제력을 바탕으로 많이 회복된 상황이었으므로

아버지처럼 강렬한 카르스마로 나라를 이끌 수 없었던 그로서는 이래저래 고민이 많았을 것이다.

그래도 아무 짓도 안할 수는 없으므로 아버지의 정책도 계승하고 새로운 카리스마도 축적할 겸,

막내 동생 톨루이와 합작하여 몽골의 국력을 총동원한 20만 병력을 이끌고 금나라 정벌을 떠나게 되었는데,

아무래도 만주가 신경쓰였는지 본대 후위의 역할도 하면서 만주지역을 장악할 별동대 3만을 따로 구성하였다.

이 별동대의 수장은 활을 잘 쏘아 징기스칸의 신임을 받았다는 잘라이르족 출신의 맹장 살리타이였는데,

그의 직위가 점령지역에서 황제의 권한까지 행사할 수 있는 권황제였던 것으로 보아,

오고타이는 만주니 고려니 하는 따위들은 살리타이에게 맡겨두고, 금나라와 싸우는데 집중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어찌보면 거란의 1차 침입과 유사점이 많은 전쟁이었다고 할 수 있었는데,

뭐가 되었건 1231년 압록강을 건너 철주의 처절한 저항을 짓밟은 살리타이는 정주를 점령한 후

부대를 각각 1만씩, 본대, 남로군, 북로군으로 나누었고 매국노 홍 복원이 바친 안주로 진출하였다.

남로군은 개경을 직공하고 북로군은 귀주성을 공격하게 한 후 자신은 안주에 머무르며 전쟁을 조율하고자 한 모양인데...그건 지 생각이었고,

살리타이의 구상은 고려군의 분투로 처음부터 어긋나기 시작하였다.

귀주성을 점령하기 위해 기세등등하게 출발했던 북로군이, 의지의 한국인 박 서와 희대의 용장 김 경손에게 발목이 잡힌 것이다.

당시 귀주에는 5000여명 정도의 패잔병들이 몰려 있었던 모양인데,

정주에서 분루를 삼켰던 김 경손은 척 준경에 필적하는 용맹으로 병사들에게 전투의지를 불어 넣었고,

박 서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리더쉽을 보여주며 전쟁이 끝날 때까지 북로군 1만의 발을 묶어 놓았다.

또한 최 우가, 외적을 내륙 깊숙이 끌어들여 유리한 지형에서 영격하는,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작전에 따라 파견한,

, , 3군으로 구성된 약 2만 정도로 추정되는 중앙군이 동선령 고개에서 남로군과 야전으로 맞붙어 승리하는 기염을 토하였다.

이 겁없는 중앙군은 승기를 잡았다고 판단하고 또 한 번의 귀주대첩을 위해 밀어 붙였으므로, 골군은 안주를 버리고 정주까지 퇴각할 수 밖에 없었다.

살리타이가 옛날의 소 손녕이 꼴이 난 것이다.

당시 고려에 또 다른 서 희 장군이 있었다면...아쉬운 기회였다.

 

정주에서 이를 갈았는 지는 알 수없으나 그대로 맥 없이 돌아갈 수는 없기에 몽골군은 재정비를 마치고 다시 안주의 안북성으로 몰려들었는데,

지난 승전으로 고무되어 있던 일부 무장들이 몽골의 전투력을 과소평가했는지는 모르나,

무능 꼴통의 대명사 대 집성을 중심으로 조기 결전을 주장하는 바람에,

멀쩡한 성을 놔두고 야전이라면 세계 최강이라고 할 수 있는 몽골군과 성 밖에서 맞붙는 우를 범하였다.

결국 보병 중심의 고려군은 간단한 유인책에 걸려 각개격파를 당하였고...

전체 병력의 절반을 잃고 안북성에 고립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이 전투의 이후 고려의 중앙군은 수세에 몰려 감히 몽골군과 야전으로 맞설 생각을 못하였고,

개경이 포위되는 것을 멀거니 바라만 봐야했다.

안북성에서 초전에 그렇게 참패하지만 않았더라면 이후의 전쟁의 양상은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고려의 중앙군을 무력화시킨 몽골군은 그야말로 파죽지세로 진군하여 개경으로 몰려들었는데, 

포위 하고 보니 ​개경은 그리 만만한 도시가 아니었다.

그간의 수많은 외침 덕분에 성을 비롯한 방어 준비가 잘되어 있었고,

최 우의 가병 수만 명을​ 비롯한 고려 최강 전력이 몰려 있었며,

최가의 독재권이 확립된지 오래 되었기 때문에 적전 분열도 없었다.

아직 귀주성을 함락시키지 못하여 전력을 다 모을 수도 없었던 백전 노장 살리타이는 ​

자신 없는 공성전을 하기 보다는, 흥왕사를 불태우는 등 주변 지역을 초토화하여 고립시키는전략을 택하였는데,

덕분에 외적을 물리치는 것 보다는 자신의 신변 보호에 훨씬 더 열심이었던 최 우와 그 일당들은 상대적으로 편해졌으나 개경 밖의 백성들은 지옥을 맛보아야 했다.​

경기도를 지나 충주까지 약탈 구역을 넓혀가는 몽골군을 본 최 우는 재추회의를 열어 항복을 결정하였는데,

진심으로 굴복했다기 보다는 일단 눈앞의 불을 끄자는 심정이었을 것이다.​

살리타이 또한 천하 대세에 별 영향도 없는 고려에서 가뜩이나 부족한 금쪽같은 전사들을 소모하기 보다는

명분과 실리를 챙기고 개선하는 것이 여러모로 좋았으므로,

적당한 선에서 마무리를 하고 퇴각하였다.

이렇게 해서 약 7개월에 걸친 1차 전쟁은 끝이 났으나

이는 끝이 아니라 고려에 지옥문이 열리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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