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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 인류의 문명과 과학을 이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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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우리는 많은 유리들과 마주하며 살아간다. 당신은 어쩌면 아침에 '유리로 만들어진' 거울을 보며 용모를 단정히 했을 것이고 '유리로 만들어진' 잔에 물을 부어 목을 축였을 것이며, '유리가 있는' 텔레비전 뉴스를 잠시 시청하다가 '유리가 있는' 휴대전화를 보며 출근했을 것이며,  지금 '유리로 만들어진' 창이 무수히 많은 회사에서 '유리로 만들어진' 시계를 보며 퇴근할 시간을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 이처럼 우리와 유리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유리에 대하여 다식하다할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유리의 기원에 관하여 세계 최초의 백과전서로 평가받는, 로마의 박물학자 플리니우스의 '박물지(博物誌)'에는 이러한 기록이 있다.

 

 

'천연소다를 무역하는 페니키아의 상선이 지중해 연안 강 하구에 이르러 식사 때가 되어서 취사 준비를 하고자 했으나 주위는 모래사장이고 솥을 걸 재료가 없었으므로 자기들 배에 적재한 소다덩어리를 받침으로 하여 솥을 걸고 불을 붙여서 취사를 하는데, 불길이 세짐에 따라서 소다가 모래와 융합하여 처음 보는 반투명의 액체가 몇 줄기 흘러내려왔다. 이것이 유리의 기원이다.'

 

 

그러나 제 1,2차 세계대전 전후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일대에 걸쳐 발굴 조사가 시작되면서 유리의 기원에 대해 다시 의문이 증폭되기 시작했다. 유리 구슬과 유리 용기 등 매우 많은 유리 유물이 발굴되었던 것이다. 현재 가장 오래된 유리는 BC 2500년경 고대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에서 만든 유리구슬로 알려져 있으며 BC 2000년 전에는 유리 덩어리를 깎아 만든 메소포타미아 최초의 유리 그릇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현재 아직까지도 유리의 기원설을 두고 메소포타미아 기원설과 이집트 기원설이 첨예한 대립을 세우고 있으나 대개 메소포타미아 기원설에 많이 기울어진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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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년 이집트 왕가의 계곡 투탕카멘(?~?, 재위기간: BC1361~1352) 무덤에서 발견된

칠보 장식 황금 가슴받이-

 

(여기서 칠보(七寶)는 금속의 산화물을 착색재로 사용하여 투명 또는 불투명한 유리 질의 유약(釉薬)을 구리, 청동, 금, 은, 도자기, 유리 등의 바탕에 구워 붙인 장식물을 뜻한다(네이버 백과사전 참조))

 

 기원전 4세기 알렉산드로스의 원정과 헬레니즘 문화의 도래로 알렉산드리아 유리 제조의 중심지로 부각하였다. 알렉산드리아의 장인들은 이른바 모자이크 유리(비잔틴 유리)라고 알려진 기술을 완성했는데, 여러 색깔을 가진 유리 막대기을 가열하여 말랑말랑하게 만들어서 서로 엮어 다양한 장식을 내는 기법이었다. 이때 처음으로 유리와 같은 창이 나왔다고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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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자이크 유리 구슬-

 

 

한편, BC 1세기 무렵 시리아의 장인들은 속이 비어 있는 대롱의 끝자락에 유리를 부풀려 용기를 만드는 방법을 터득했다. 유리 제작 역사 가운데 가장 혁신적인 기술이라 불리는, 일명 우리가 대롱 불기 기법이라고 부르는 블로잉 기법의 발견이었다.  이 기법으로 유리의 형태를 자신이 바라는 모양으로 자유롭게 만들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기법은 워낙 단순하여 순식간에 로마 제국 전역으로 확산 되었고 이 기법으로 이제 유리 용기는 상류층이 사용하는 고급품이 아닌 일반 백성들의 식기나 저장 용기로 상용화되기 시작하였다. 이로써 유리 제조의 중심은 북아프리카와 서아시아에서 유럽 로마로 옮겨졌다. 이 시기에 만들어진 유리 제품을 흔히 '로만 글라스(Roman Glass)라고 부르는데, 전국시대부터 유리 제작을 시작한 중국은 이를 도입하여 유리 공예를 발전시켰다. 즉, 로만 글라스는 동서 무역 교류의 중요한 교역품으로써 광할한 유라시아 전역에 널리 보급된 것이다. 또 로마인들은 두 가지 색상의 유리를 겹쳐 위쪽 유리는 깎고 아랫쪽 유리의 색으로 문양을 내는, 이른바 카메오 유리를 완성했다. 

 

 

그런데도 우리는 유리 공예라 말하면 베네치아라는 이탈리아의 도시를 떠올린다.우리가 흔히 베네치아유리(무라노 유리)라고 불리는 유리 제품은 우수한 기술과 신선한 디자인 덕분에 근세 유럽 유리 공예를 주도했기 때문인데, 베네치아 석호로부터 약 1.5km 떨어져있는 무라노라는 섬에 그 비밀이 숨겨져 있다. 유럽에서는 유리 제조 기술이 약 3세기 초반부터 1000년 동안 쇠퇴를 맞이하게 되나 비잔티움제국은 로마제국의 유리 제조 기법을 전승하고 있었다. 1204년 콘스탄티노플이 십자군에게 점령되자 이때 비잔티움제국에 있던 유리 공예 장인들이 베네치아로 이주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1291년, 유리 제조 공장에 화재가 잦게 발생하자 베네치아 총독은 안전 사고 방지와 함께 유리 산업을 보호, 육성하고 기법 유출을 막는다는 명목으로 유리 공장과 유리 제조 장인들을 무라노 섬에 강제로 이주시켰던 것이다. 이때 건설된 공장이 무라노 섬에는 아직 남아있다. 이후 무라노 유리 제조인 안젤로 바로비에는 산화칼륨과 망간이 많은 해초를 불에 태워 재로 만든 다음 융해된 유리에 첨가하여 세칭 '크리스탈로'를 발명해 역사에 족적을 남겼다. 이 크리스탈로 글라스로 인하여 수출 무역이 번성하게 되었던 것이다.

 

 

16세기에 이르러서는 투명 유리에 색채를 입히는 기법과 유리 원료에 금속 물질로 생긴 원시 유리의 자연적 희부연 색깔을 제거하는 기법도 터득했으며 도금과 에나멜을 입히는 기법까지 알아냈다. 이런 기법은 철저하게 비밀로 부쳐졌는데, 이것을 어기면 극형을 받아야 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네치아의 유리 공예 장인들은 탈출하여 제노바 인근 알타레에 많이 정착하여 알타레 유리를 만들었고, 이때문에 비밀로 부쳐졌던 비법들이 알려지기 시작해 16세기부터는 프랑스와 독일, 영국, 네덜란드를 포함한 여러 나라에서 베네치아 유리를 모방한 베네치아 풍을 뜻하는 불어 파송 드 베니스를 생산해 냈다. 이후 18세기까지 베네치아는 유럽에서 명성을 계속 누렸지만 보헤미아와의 경쟁에서 밀려 유리 제조의 명성을 어느 정도 잃게 되었다. 사실 베네치아 글라스의 핵심은 투명도에 있었는데 보헤미아 글라스는 베네치아 글라스보더 더욱 투명했기 때문이었다. 19세기 이후부터 구형 제품 이외에 별도의 제품은 거의 만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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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의 명물, 베네치아 글라스(출처: 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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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헤미아 글라스(소장: 체코국립박물관)-

(1836년 무렵에 제작한 요세프 융만에게 헌정한 잔으로 보헤미아 글라스 가운데 명품의 하나로 꼽힌다)

 

 

한편, 17세기까지  잉글랜드는 베네치아의 전통을 따라 유리를 만들고 있었는데, 1675년 경 조지 레이븐즈크로프트가 베네치아 유리에 산화납을 첨가하면 더욱 단단하고 무거운 유리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광채와 투명함, 고굴절성을 특징으로 하는 플린트 유리를 발견한 것이다. 이것은 사람들이 즐겨 찾는 훌륭한 식기용 유리가 되었다. 이후 19세기 후반에 이르러 일부 유리 제조업자들은 색을 넣거나 깎아서 장식을 한 제품보다 유리 자체가 가진 본래의 아름다움을 강조하는 양식에 관심을 기울였다. 특히 루이스 컴퍼트 티퍼니가 창안한 파브릴 유리는 유연한 모양과 빛나는 포면으로 크게 찬사를 받았고, 특히 중부 유럽의 유리 제조업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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