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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그리고 '인천상륙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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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25 전쟁의 전세를 바꾼 작전 

 

1950년 06월 25일 북한군이 소련(지금의 '러시아')의 지원을 받아 파죽지세로 이남지역을 밀고들어와 서울, 춘천을 포함하여 전주, 광주, 진주를 점령하고, 한국군은 대구, 포항 등 낙동강 부근을 수호하며 급하게 전쟁을 막기 바빴다. 전쟁이 발발하기 전 한국군의 전력의 대부분은 비상경계발령 해제로 인해 외출한 상황이라 전쟁에서 한국군이 불리한 상황이였다. 그리고 당시 북한군에 비해 한국군은 전투기, 탱크 등의 무기들이 전무하였다.

그래서 당일 미국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를 긴급으로 소집, 북한군이 남한지역에서 철수할 것을 요구하였고, 그로부터 이틀날 안전보장이사회는 유엔 회원국에 대한민국 원조를 권고하는 결의를 채택하였다.

그러면서 1950년 9월 15일, 유엔군은 더글러스 맥아더를 중심으로 인천상륙작전을 개시하였다.

인천상륙작전을 요약하여 간단히 설명하면 남진하는 북한군의 허리를 절단하여 섬멸한다는 계획이다.

그런데 이 인천상륙작전은 지금의 결과와 달리 당시 반대하는 사람이 많았다. 왜냐하면 인천의 자연적 조건이 대규모 상륙작전을 하기에는 부적절한 곳이라는 이유 때문이였다.

인천 앞바다는 간만의 차가 매우 심하기 때문에 상륙작전을 할 수 있는 날이 제한될 수 밖에 없다는 점 그리고 맥아더가 계획하는 9월의 경우 15일부터 3일간이 가능하고, 이때를 놓치면 다음 한 달을 기다려야 한다는 점과 상륙 가능 날짜에도 밀물이 꽉 들어차는 아침과 저녁 두 차례 각각 3시간 정도의 제한된 시간 내에 행동을 완료해야 한다고 했다.

둘째, 인천항은 대규모 상륙함대가 자리잡기에 협소할 뿐만 아니라 항구에 이르는 해상 접근로가 제한되어 있어서 상륙작전은 인천항에 앞서 월미도를 점령해야 하므로 아침에 월미도, 저녁에 인천을 점령하는 2단계를 거쳐야 한다.

셋째 높은 벽의 상륙해안을 기어오르기가 어렵고, 그것을 극복한 다음에는 곧 시가지에서 적과 교전해야 한다.

그래서 미합동참모본부는 육군과 해군참모총장을 파견하면서까지 맥아더에게 인천이 아닌 다른 상륙지를 선정하는 방안을 검토하도록 요구하였다.

그러나 맥아더는 여러 사람들이 반대한 그 이유 때문에 인천을 선택했다. 즉, 아군뿐만 아니라 적도 어렵다고 생각할 것이기 때문에 그러한 의표를 찔러서 공격하면 전략적 기습 효과를 올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알고보니 적은 인천을 허술하게 지키고 있었다.

그래서 9월 15일 오전 6시, 한, 미 해병대는 월미도에 상륙하기 시작하여 작전개시 2시간 만에 점령을 끝낸다.

2단계로 한국 해병 4개 대대, 미국 제7보병사단, 제1해병사단은 전격공격을 감행하여 인천을 점령하고 김포비행장과 수원을 확보함으로써 인천반도를 완전히 수중에 넣었다.

마지막으로 제3단계로 한국 해병 2개 대대, 미국 제1해병사단은 19일 한강을 건너 공격을 개시하고 20일 주력부대가 한강을 건너 27일 정오 중앙청에 한국 해병대가 태극기를 게양함으로써 작전을 끝냈다.

이 작전에 참가한 미 제7보경사단은 약 8,600명에 달했고 한국군의 총 병력은 13,000명에 이르렀다. 약 20%에 해당하는 병력이 인천시가지에 적을 소탕하고 민간인 복장으로 숨어 있는 적을 모두 색출해냄으로써 지대한 공을 세웠다.

정말로 인천의 적 방비태세는 엉성하기 짝이 없어서 2,000명 밖에 되지 않은 북한군을 쉽게 제압, 서울을 완전히 9월 28일 탈환하는 데에 성공했다.

이 작전을 통해서 한국군과 유엔군은 38도선 이남을 모두 회복했고 적은 약 10만명의 병력을 잃었으며 북으로 도주한 자는 3만 명이 채 안되었다.

이로써 인천상륙작전은 20세기의 칸나에 전투라고 평가할 정도로 평가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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