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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칼럼

[국제/연구자료] [may 자유교류글]머러셰슈티 전투(Battle of Mărășeș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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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년 '사라예보 사건'으로 인해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루마니아는 중립의 입장을 견지했으며, 이로 인해 경제적으로 많은 이익을 얻었다. 하지만 1916년 8월, 루마니아는 트란실바니아와 바나트, 부코비나의 획득을 골자로 전쟁에 참전하여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령 트란실바니아를 공격하였다. 그러나 이 진격은 곧바로 동맹국 군대에 의해 반격을 맞이하게 되었고, 불과 몇달 채 되지 않아 수도 부쿠레슈티를 점령당했다. 왕실은 제정러시아 영토랑 가까운 이아시로 피난했고, 독일군은 진격을 계속하였다. 어느새 이아시 근처까지 진격한 동맹군의 공격을 지속되었고, 루마니아군은 힘겨운 방어전을 치루어야 했다. 1917년 8월에서 9월 사이에 일어난 머러셰슈티 전투도 그중 하나이다. 

 

AmplasareaRomanian troops at Marasesti in 1917

왼쪽 사진은 1차 세계대전의 전장이었던 머러셰슈티(검정색으로 색칠된 곳) 마을이며, 루마니아 동부 브란체아 주 러코아사(Răcoasa)지역에 속한 5개 마을 중 하나이다. 오른쪽 사진은 머러셰슈티 전투 당시 루마니아군의 모습이다.

 

 1917년 7월 22일, 멘셰비키 러시아의 지원하에 루마니아와 러시아군은 시레트(siret) 강 하구에 위치한 머러셰슈티에 주둔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제 1군단을 공격하여 초반에 소기의 성공을 거두지만, 갈리시아에 주둔한 동맹군의 지원군이 오자 7월 25일, 루마니아-러시아군은 공격을 중단하였다. 이에 동맹국은 루마니아와 러시아(멘셰비키)군의 공격에 대해 좌시할수 없었다. 1차 세계대전 시 동유럽 전선에서 전공을 세운 독일제국의 육군원수, 아우구스트 폰 마켄젠의 지휘 하에 동맹국군(독일-오헝제국) 24만 5천명(루마니아군은 21만 8천)은 재차 역습을 감행하였다. 하지만 루마니아군과 러시아군의 완강한 방어로 인해 역습은 실패했고, 전투는 일진일퇴의 상황이 지속되다가 9월 8일 양측의 인명이 손상됨에 따라 자연스레 끝나게 되었다. 독일은 루마니아 군대를 격파하지 못했지만, 계속된 전투로 인해 병사들의 사기가 떨어져 진격도 하기 힘든 상황의 루마니아군은 상대방의 영토로 진격하지 못했다. 따라서, 전투 하나 치루었다고 해서 전세를 바꾸는 것은 루마니아군에 있어서 무리였기 때문에 이 전투는 '전략상' 동맹국의 승리라 할수 있겠다. 여담으로, 그 당시 루마니아군은 패탱의 명언을 인용한 '너는 절대로 이곳을 통과할수 없다(Pe aici nu se trece)'를 구호로 내걸엇었다. 

800px-Pe_aici_nu_se_trece_-_morm%C3%A2ntul_eroului_necunoscut_-_Mausoleul_de_la_Marasesti.jpg

머러셰슈티 전투 당시 사망한 루마니아군의 묘지. 위에서 말한 '루마니아군의 구호'가 새겨져있다.

 

 약 1달에 이르는 기간에 일어난 전투에서 루마니아랑 동맹국의 사망자 수는 비슷했는데, 전투기간동안 양측이 일진일퇴를 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라 본다. 머러셰슈티 전투에 참전했던 동맹국측 군대는 27,410명이, 루마니아군은 장교들까지 포함해 27,410명이 전사하였다.

 

 앞서 말했듯 이 전투는 전세에 별다른 역할을 못했고, 루마니아는 적들을 막느라 군대의 사기가 저하되었다. 심지어 같은해 11월에는 볼셰비키가 주도한 제 2차 러시아혁명이 성공하자 루마니아는 불리한 위치에서 동맹국 군대에 맞서 전투를 수행해야 했었다. 그에 지친 나머지 1918년 초반, 루마니아는 독일을 위시한 동맹국에 항복하였고, 같은해 11월까지 독일의 강점 하에 있었다.  

 

[이 게시물은 마루밑다락방님에 의해 2015-10-23 20:19:42 인문학 자료실에서 이동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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