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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칼럼

[국제/연구자료] [MAY]벵그로프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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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63년 1월에 폴란드인들은 1830년과 같은 거국적인 봉기를 일으켰고 이를 1월 봉기(January Uprising)라고 한다. 하지만 33년 전처럼 전면전이 아닌 유격전으로 적에 맞섰다. 그렇게 한 데에는 1830년과 달리 정규군이 거의 전무하다싶이 했고 무장이 빈약한 민병대나 농민병이 대다수를 차지했기 때문이다. 이 전투 역시 1월 봉기의 특성-전형적인 유격전 형태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폴란드 봉기군은 동(東)마조비아에 위치한 벵그로프(Węgrow)를 장악한 뒤 3천 5백명의 병력을 모집했고 진지를 구축하였다. 그로써 주사위는 던져졌고 1월 봉기의 대표적인 전투인 벵그로프 전투가 발발하였다.

 

Battle of W

벵그로프에서 러시아군에 저항하는 폴란드 봉기군 

러시아군은 이를 놓치지 않았고 봉기군보다 훨씬 정예화된 1000명의 정규군과 수문의 대포를 거느리고 벵그로프 마을을 탈환하기로 결정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벵그로프 주둔 봉기군 지도자였던 얀 마트린스키(Jan Matliński)는 봉기군에게 퇴각을 명령했다. 얼마 되지 않아 1000명의 러시아 정규군이 마을로 진입하기 시작했고 폴란드군의 안전한 퇴각을 위해 500명의 농민병이 러시아군의 좌측을 공격하여 분전하였다. 이들은 러시아 정규군의 공세에 밀렸고 결국 마을은 러시아군의 수중에 떨어졌다. 하지만 러시아군이 500명의 농민병과의 전투에 집중한 틈을 이용해 대부분의 봉기군은 안전히 마을을 떠날수 있었고 전투는 사실상 종료되었다. 이때가 1863년 2월 3일이다. 실제로 위와 같은 전투처럼 유격전을 통해 1월 봉기 당시 폴란드군이 러시아군을 애먹이기도 했고 러시아는 그런 봉기군을 진압하는 데에 꽤 오랜 시일이 걸렸다. 

이 전투가 유럽에 알려지자 여러 문인들은 이 전투를 고대 스파르타 전사들의 영웅적 항전인 테르모필레 전투(Battle of Thermopylae)와 비교하여 시를 썼다. 벵그로프 전투는 종종 폴란드의 테르모필레 전투라고도 불리어진다. 글을 쓰고 나니 1939년 독일의 폴란드 침공 당시 최초로 벌어진 베스테르플라테 전투와 벵그로프 전투랑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며, 전략상 폴란드 봉기군의 승리라 생각된다.(전투상 러시아군의 승리) 그 이유는 위 본문을 깊이 읽어보시면 아시리라 본다. 자유 폴스카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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