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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칼럼

[국제/연구자료] 그레미(გრემ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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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의]

 트빌리시 동쪽 175km 지점에 위치한 곳이다. 이곳은 16-17세기 동안 옛 카헤티 왕국의 왕도(王都)였고 크게 번성했지만, 17세기 페르시아에 의해 파괴되었다. 이후 마을로 퇴락하였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이 지역이 왕도이자 번성한 도시였다는 것을 증명하듯, 16세기 조지아 건축에서 대표적으로 꼽히는 그레미 요새가 남아있다.

그레미에 남아있는 요새(좌)와 그레미 요새를 건설한 카헤티왕국 국왕, 레반(우)

 

[역사]

 그레미(გრემი)는 카헤티 왕국의 초창기부터 왕국의 수도였다. 한때 이 도시는 실크로드가 통과하는 곳에 위치해 무역이 활발했고 번성하였고, 외국인들도 많이 거주하고 있었다. 특히 아르메니아인은 도시 내에 많이 거주하고 있었다. 이에 관한 기록은 러시아 여행자의 기록을 보면 알수 있다.


「그레미에서 아르메니아인들은 자신들의 시장과 성당을 소유하고 있었고, 그들의 성당은 왕궁 근처에 위치했다

                                                                                            -표도르 볼콘스키(Fedor Volkonsky)- 


 짧게 기록했지만, 위 글을 보면 그레미에서 아르메니아인들의 세가 컷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처럼 외국인들이 많이 거주하였고 실크로드 무역의 거점에 위치했던 그레미는 번영의 길을 걷고 있었으나, 이어 먹구름이 닥쳐왔다.


 1610년, 사파비 페르시아의 아바스 1세는 조지아-사카르트벨로 지방에 자국의 영향력을 확대하려 시도하였다. 이러한 정책이 이 지속되었고, 사파비 페르시아는 결국 조지아의 지역들을 침략하기에 이르렀다.(1616) 조지아 지역에서 번성했던 도시들은 황폐화되었고, 그레미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번성했던 그레미는 사파비 페르시아군에 의해 황폐화되었으며, 이로 인해 그레미는 무역도시로써의 기능이 상실되었고 결국 카헤티 정부는 17세기 중반에 수도를 텔라비(თელავი)로 천도하기에 이르렀다. 이후 그레미는 퇴락하여 오늘날에는 일개 촌락으로만 그 흔적을 보일 뿐이다.


 무역으로 인해 번성하였고, 아르메니아인들이 많이 거주했던 그레미는 페르시아의 페르시아의 말발굽에 짓밟혀 퇴락하였다. 퇴락한 카헤티의 옛 왕도의 발굴은 1939년부터 시작되었다. 옛 카헤티 왕도의 유적들은 소련 고고학자들의 주도 하에 1939~1949년과 1963~1967년에 이르는 기간에 발굴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조지아 정부는 2007년부터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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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 내부의 프레스코화들(좌),요새 내부에 위치한 와인저장고(우)


[그레미 요새]

 그레미의 대표적인 문화유적중 하나로는 3층 높이의 그레미 요새(본명:대천사 성당과 왕궁)가 있다. 이곳은 성당과 왕궁의 기능을 했으며, 1565년에서 1677년까지 카헤티 왕국의 국왕이었던 레반(제위:1518/1520-1574)의 명령으로 지어졌다. 요새 내부에는 프레스코화가 있으며 북문, 남문, 서문으로 이루어져 있다. 요새 내부 성당의 돔은 모서리와 2개의 교각이 지탱하며, 이곳에 딸린 유적으로는 인근 강으로 연결된 비밀통로와 와인 저장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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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레미 요새'라 간략히 칭한 이유는 원래 이름인 '대천사 성당과 왕궁'을 쓰기에는 번거로운 면이 적잖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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