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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칼럼

[국제/연구자료]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사]-(2):헨릭 발레지, 귀족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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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72년, 야기에우워 왕조 최후의 왕, 지그문트 2세가 운명하였다. 연방은 왕이 없는, 공위 기간이 되었다. 이에 귀족들은 왕을 선거로 뽑는다는, 이른바 선거왕제라는 기발한(?)아이디어를 내었다. 왜냐, 국가의 안정과 귀족들의 이익을 위해서는 그게 안성맞춤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유럽 국가들의 반응은...

 

"폴란드라는 나라, 선거로 왕을 뽑는다지, 폴란드 왕이 되볼까"


이런 반응을 나타냈고, 유럽 각국에서 왕족이나 귀족들이 폴란드 왕위에 오를려 출마를 하였다. 이때, 프랑스의 앙리 드 발루아(앙리 3세)가 모후인 카트린 메디시스의 후원을 받았고, 정치경험이 모자라, 귀족들이 요구한 '황금의 자유'를 승인하였다. 일명 헨릭 발레지 조항(헨릭 발레지는 앙리 드 발루아의 폴란드식 이름)이라고도 한다. 이에 귀족들은 헨릭 발레지를 왕위에 올렸다.


-황금의 자유-

1. 선거를 통해 자유롭게 왕위를 선출한다(선거왕제)

2. 의회(세임:sejm)을 정기적으로 소집한다.

3. 세임은 리베룸 베토(무제한의 반대)라는 권한을 가진다

4. 파크타 콘페타:왕과 귀족들의 계약관계로, 리베룸 베토와 비슷하게 왕권을 제약한다

5.로코슈: 왕이 귀족들을 탄압할 때 귀족들은 반란을 일으킬 수 있으며, 이것은 합법이다

6.콘페데라치아(동맹): 정당 및 정치적 자유를 가진 단체결성의 자유


(이런 말도 안되는 조항을 보니 헨릭 발레지가 정치경험이 부족한지 알만하다)


 왕위에 오른 헨릭 발레지는 프랑스 상황을 주시하였다. 왜냐? 프랑스는 자신의 모국이자, 그는 명색이 왕족이기 때문이기에.. 왕위에 오른 1573년, 그보다 1년 전인 1572년, 프랑스에서는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 전야에 위그노들을 샤를 9세가 명을 내려 학살하였다.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 전야의 학살 뒤, 프랑스 내에서 위그노 전쟁이 벌여졌다. 그리고 위그노 학살을 주도한 샤를 9세(앙리 드 발루아:헨릭 발레지의 형)가 죽자 헨릭 발레지는 크라쿠프를 탈출하였다. 이에 격분한 시민들과 귀족들은 헨릭 발레지를 쫒아가봤지만 허사였고, 다시 공위 기간이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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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황금의 자유를 쓴 것은 할짓이 없는게 아닌, 이후 연방에서 지대한 역할을 하기 때문에 기록하였습니다.

2. 귀족공화국이라 칭한 것을 뻔하죠. 귀족들이 대놓고 반란을 일으키고, 이미 강화된 귀족들의 권한이 더욱 강해져 왕권도 쥐락펴락 할수 있어서 그리 칭한 겁니다.

3. 밀덕들이 핰핰거리고, 칭송하는 윙드 후사르, 그 창시자인 스테반 바토리 편이 나올 겁니다.

4. 리베룸 베토, 무제한의 자유인데, 세임에서 한표라도 반대표가 나오면 그 안건은 취소되는 게 리베룸 베토입니다. 생각만 해도 뚜껑이 열린다

(그러고보니 오늘 분량이 적네요..헨릭 발레지 조항이 폴란드- 리투아니아 연방의 앞날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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