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연구자료]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사]-(4):대결구도, 혼란의 도가니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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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으로 폴란드를 위해 노력한 군주이자 왕권 강화, 그리고 유대인 보호칙령과 대학 설립, 왕립재판소 설립, 군제개혁을 통해 윙드 후사르를 탄생시킨 스테반 바토리는 1586년, 흐르도나(벨라루스의 도시)의 고성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어 연방에는 3번째 공위 기간이 찾아왔다. 연례행사인가 연방은 다시 선거를 실시하였다. 유력 후보로는 스웨덴의 지그문트 3세 바사와 오스트리아 대공인 막시밀리안 3세. 스테반 바토리 말년에 자모이스키 가문과 즈브로프스키 가문은 파벌을 형성하였다. 자모이스키는 전자를, 즈브로프스키는 후자를 지지하였으나, 실세인 자모키 앞에 즈브로프스키도 어찌할수 없었던 지. 1587년, 지그문트 바사가, 지그문트 3세 바사로 왕위에 등극하였다.(그는 독실한 구교도여서 신교도인 단치히 시민들의 저항을 받기도 함) 그러나 이에 불복한 막시밀리안 3세는 군사를 일으켜 크라쿠프(1595년 천도 이전까지 연방의 수도)를 공격해보았으나, 별 성과가 없어 크라쿠프에서 철수하였다. 그러나 완전히 포기한 것은 아니어서, 한 마을에서 자모이스키랑 야전을 벌였다. 결과는 자모이스키의 승리였고, 막시밀리안은 포로가 되어 13개월동안 곤욕을 치뤘다. 1589년, 그의 형인 신성로마제국 황제 루돌프 2세가 다시는 폴란드에 나대지 않고, 지그문트의 왕위를 인정한다는 식으로 조약을 맺고, 지그문트는 연방의 왕위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그는 전왕인 스테반 바토리와 다른 인물. 치세 내내 폴란드-스웨덴 동군연합을 이룰러 애꿎은 폴란드인의 피들을 쏟아부었다. 즉위 이후, 합스부르크 문제와 종교 문제 등으로 자모이스키랑 코드가 안맞게 되자, 정적인 즈브로프스키 가문과 결탁하였고, 1592년, 지그문트 3세의 아버지인 요한 3세가 사망하자, 스웨덴으로 돌아가 신교를 인정한다는, 그런 서약을 하고 스웨덴의 왕이 되었다. 몰론 얀 자모이스키가 반대해 왕 폐위하자 결의했지만 실패로 돌아갔고.. 이 둘의 관계는 강을 건넌 듯 하다. 스웨덴의 왕까지 겸임한 지그문트는 요한 3세의 동생인 칼 대공에 섭정을 맏긴 후 폴란드로 귀국하였다. 그러나 1595년, 칼 대공이 반란을 일으키고, 지그문트는 스웨덴으로 귀국해 전투를 벌였지만..군사적인 재능이 부족한 탓에 패배하고, 칼 대공에 왕위를 주고, 굴욕적이게 폴란드로 귀국하였다. 그리고 이후 지그문트는 스웨덴-폴란드 동군연합이라는, 허황된 꿈을 꾸기 시작하였다. 폴란드나 잘맏지 그리고 같은 해, 크라쿠프에서 바르샤바로 수도를 천도하였다.
그리고 정적 관계가 되어버린 자모이스키에 몰다비아에 자유 재량권을 주었다. 연방의 땅이 아닌데도...어찌됬든 자모이스키는 몰다비아로 원정을 떠났고, 그곳 대공을 자기 입맛에 맞는 사람으로 교체했다. 당연 여기에는 윙드 후사르가 활약을 했지만. 그 와중에 한창 폴란드 남동부에서 깽판치고 다니는 타타르도 처리를 하였고..이후 자모이스키는 북쪽으로 돌아갔다. 여기에도 윙드 후사르는 종횡무진 활약을 펼쳤다긔
(후사르는 날개장식 전투에서 안썼다능..폴란드 학계에서 밝힌 바로 그렇다 한다. 갑옷은 스테반 바토리 편에서 말했다시피 15KG의 갑옷이 장착되어 있다. 근데 그게 앞면에만 쏠려있다 한다. 충격력을 강화하기 위해서)
지그문트는 단연 놀랄수밖에 없었죠. 그러나 이얘기는 집어치우고(?) 그가 죽을 때까지 스웨덴-폴란드 동군연합을 위해 폴란드인들을 희생시키며 갖가지 노력을 하였다. 오오 깡패 본능 일단 스웨덴이랑 적대 구도를 계속해서 유지하였고...그러나 직접 싸우지 않고, 1605년까지는 세력가이자 정치경륜이 있던 폴란드의 이인임 얀 자모이스키의 눈치를 보며 신경전을 하였다.
한편 이반 4세가 죽은 뒤 모스크바 대공국은 차르 표드르가 즉위하였다. 그는 정사에 그다지 관심을 보이지 않는 인물이었고, 보리스 고두노프가 사실상 실세로 등극하였다.. 그리고 불행한 차르 표드르는 죽고..뒤를 이어 사촌빨 되는 보리스 고두노프가 즉위하였으나, 치세 기간 찾아온 대기근과 농노제 강화로 인해 지지도를 잃고 몰락하기 시작하였다. 거기에 덤으로 폴란드에서 가짜 드미트리라 참칭하는 사람이 나타나 폴란드의 왕인 지그문트 3세와 귀족들의 지원을 업고 러시아 영내로, '가짜 드미트리'는 침공하였다. 마침 차르인 보리스 고두노프가 1605년에 사망함으로써 고두노프 측의 군사들까지 가짜 드미트리 쪽으로 가담함으로써 가짜 드미트리의 반란은 성공하였고, 가짜 드미트리는 차르로 등극하였다. 러시아는 역사상 대동란(1605-1618)이란 시기가 전개되었고, 여기에 휘말려들은 폴란드 역시 대동란에 진을 빼야 했으리..내가 봤을땐 둘다 막장이야..막장이올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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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그문트 3세 바사가 왕위에 등극하고, 폴란드로 들어올 때, 신교도인 단치히 시민들은 독실한 구교도인 지그문트 3세 바사에 대항했다는 거.
2. 자모이스키의 몰다비아 원정이랑 막시밀리안 3세와의 전쟁 때 단연 그 주인공은 '윙드 후사르'..그들의 돌격으로 전투는 금방 끝났단.. 깡패 본능은 대단하다.
3. 대동란이라는 시기는 가짜 드미트리가 출현함으로써 시작되었는데, 이때 그가 진짜 드미트리인지 아닌지..바실리 슈이스키라는 사람이 조사하였다. 죽은 드미트리의 모후도 가짜 드미트리를 본 바 '이사람은 진짜 드미트리닷'이라 밝혔다. 바실리 슈이스키도 그리하였고..모후가 저리 말한 건 권세 한번 잡고 싶어 그런거 같다.
4. 지그문트가 1595년 스웨덴 왕직을 칼 9세에 넘겨준 뒤로 스웨덴과 간혈적인 전쟁을 하였고, 이건 대동란 중인 1611년에 휴전하엿다.
5. 얀 자모이스키의 몰다비아 켐페인은 1600년경에 이르며 절정에 다르게 되는데, 루마니아의 민족 영웅이라 불리는 미하이 비테아줄과 싸워서 승리했다. (용감공 미하이는 몰다비아, 왈라키아, 트란실바니아를 합해 대 루마니아를 실현시키려 한 사람이고 폴란드의 이해관계에 반해 자모이스키의 몰다비아 켐페인과의 마찰을 빚었다)1600년경에 자모이스키랑 맞다이 떳던 미하이 비테아줄은 생애 굴욕적인 패배를 자모이스키에 의해 맞보게 되었다.(1만 5천으로 십수만의 오스만군을 부쉈던 게 미하이. 몰론 오스만군의 전투참가 인원은 3-4만이었고..
6. 지그문트는 독실한 가톨릭교도였는데. 그의 어머니이자 야기에우워 왕가의 혈통을 이어받은 안나 야게일로워의 영향이 실로 크다 할수 있다. 지그문트 3세가 폴란드로 들어올 때 신교도인 단치히 시민들은 지그문트를 반대했다죠. '독실한 가톨릭교도를 주군으로 모실수 없다' 고 말하면서..
7. 위 본문에는 안나와있지만. 1596년 브레스트에서 폴란드 가톨릭이랑 우크라이나 정교회와 '교회 통합'을 했다. 그 결과로 우크라이나 귀족의 지위와 폴란드 내 우크라이나인들의 지위 역시 상승되었다. 이것을 전폭적으로 후원한 것은 독실한 가톨릭인 지그문트 3세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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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사항] 오랫동안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활동하면서 사람들이 소형 커뮤니티(메이 뿐만 아닌 타 커뮤니티들까지 포함한다)의 생존을 위해 하나로 뭉칠 생각은 염두에 없는건지 모르겠고....당장의 이익만 추구하는지 이해가 되질 않더군요. 아쉬우면서도 인터넷세상 경험을 해볼수 있어 좋았습니다. 다음에 연을 이어나가길 바라며.........2016-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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