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사] 백제 9 : 13대 근초고왕
본문
근초고왕...
백제의 대표적인 정복군주로서.
계왕을 살해하고 고이왕통을 멸절시켜,
귀족 세력의 이합집산으로 한시도 편할 날이 없는 백제에, 전제왕권을 수립한 철혈의 군주.
백제의 최전성기를 열고 대륙백제의 환타지를 만든 장본인.
여러가지 생각을 떠오르게 하는 백제의 명군이다.
약 30년간 재위하였는데 즉위 19년까지의 기록이 없다.
백제의 기록 부실이 가장 큰 원인이겠으나,
다른 나라의 사서에 기록될 만한 큰 일이 없었거나, 뭔가 비밀스런 일이 진행되고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재위 전반 20년 간 뭔 짓을 했건, 근초고왕은 재위 후반 10년 동안 엄청난 일들을 해낸다.
대표적인 것이 고구려와 싸워 고국원왕을 죽인 일일 것이나,
그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목지국을 정벌하여, 전라북도 지방까지 영토를 확장한 것이다.
가야의 탁순국 및 왜와 연합하여 신라를 누르고 한반도 남쪽의 패권을 장악한 후 침미다례국을 정벌하여 전남 지역까지 영향력을 확대한 것도 업적이다.
일본에 칠지도를 하사하고 아직기를 보내어 태자에게 유학을 가르쳤으며 박사 고흥에게 서기를 편찬하게 하였다.
중국 동진에 사신을 보내는 등 국제적 위상도 제고 하였는데 중국측 사서에 이름이 기록된 백제의 첫번째 왕이라 한다.
쿠데타로 집권한 후 20년 가까이 은인자중하던 근초고왕이었는데...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갑자기 이렇게 한반도의 패권을 움켜쥘 수 있었을까?
당시의 국제 상황을 보면, 근초고왕 즉위년인 346년에 부여가 전연 모용황의 침입을 받아,
왕과 백성 5만이 끌려가는, 실질적으로 패망하는 일이 벌어진다.
비록 그 이후에도 부여의 명맥은 이어지나 고구려의 보호국으로 연명이나 하는 정도 였는데...
발해의 멸망에서 보듯이 고대국가의 패망은 잔존 무력집단을 남기고,
그 무력집단의 일부는 남아서 부흥운동을 전개하거나 여의치 않으면 외국으로 망명하는 것이 상례이므로,
부여의 경우도 비슷했을 것이다.
부여와 고구려는 항상 사이가 나빴고 대무신왕 이후에는 거의 원수나 다름없었으므로,
부여의 망명 무력 집단은 고구려보다는 백제에 손을 내밀었을 가능성이 높다.
소서노의 탈출과 유사하게 부여의 무력집단이 백제로 왔다면,
그리고 발해 유민이 왕건에게 협조했던 것처럼 이들이 근초고왕에게 협조를 했다면...
백제가 갑자기 강해진 이유와 느닷없이 고구려와 그렇게 사생결단을 낸 이유가 설명되고
백제의 요서경략설도 근거가 생긴다.
근초고왕의 무 기록 20년은 부여의 망명 무력집단과 근초고왕의 합작 내지 합병을 위한 기간이었고,
근초고왕 시기의 강한 외척 세력이었던 진씨 가문이 부여와 연결고리라면, 자연스러운 설명이 가능할 것 같으나 기록이 없으니 그저 상상만 할 뿐이다.
일부 재야 사학자들이 주장하는 부여 망명 무력집단과의 합작설에 따라 스토리 구성을 해보면,
귀족 연맹체 성격의 부여가 모용황에게 무너진 후 지배층이 분열 되었고,
이들 중 전연과 고구려에 대해 적대감이 강한 세력이 근초고왕과 손을 잡았다.
이들과 손을 잡은 근초고왕은 무력에서 우위를 확보하였고, 귀족세력을 누르고 전제왕권을 확립할 수 있었다.
국내 정치를 안정시킨 후,
그동안 상전 노릇을 하던 마한의 맹주인 천안 지역의 목지국을 정벌하고,전라북도 지역까지 영토를 넓힌 근초고왕은
가야에까지 세력을 뻗히게 되었고, 가야를 통해 야마토 정권과 손을 잡는다.
어떤 식으로 손을 잡았는지는 모르지만 철기조차 없었던, 당시 왜 야마토 정권은 백제 또는 부여의 선진문물을 받아들여 일본의 강자로 떠오르게 되었고, 백제와 연합군을 형성하였다.
백제는 증가된 무력을 바탕으로 신라를 압박하여, 신라, 가야, 왜를 묶는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주도권을 행사한다.
이 네트워크에 참여하기를 거부하는 또 다른 해상세력인 전남지역의 침미다례국은, 연합군으로 정벌, 학살하여 본보기로 삼는다.
침미다례국은 당시 남만이라 불렸다는 것으로 보아 상당히 이질적인 세력이었던 듯하다.
한편 백제의 팽창은 대방군을 멸망시키고 남하하던, 선대의 원한이 겹친, 고구려에 위협이 되었고,
고국원왕의 침입을 불렀으나, 백제는 이를 물리치고 오히려 역공을 가하여 평양성을 공격하고 왕을 죽이는 기염을 토하게 된다.
이로서 백제의 영토는 경기 강원 충청 전라 그리고 황해도의 일부를 아우르는 강력한 영토 국가가 되었다.
요서경략설까지 더하면 더욱 웅대해지지만, 그 당시의 항해 기술이나 인구, 세력분포로 보아
설사 요서 백제가 존재했다하더라도 직접 통치는 무리였을 것이다.
근초고왕과 합작했던 요서의 잔존 부여세력을 지원하는 정도가 아니었을까?
그 세력이 자기들을 백제로 불렀든 안 불렀든...
백제, 왜 연합군의 결성이 일본의 가야정복설과 한반도 진출이라는, 임나 일본부설의 근거로 주장되기도 하나
당시의 일본 본토의 상황과는 잘 맞지않는다.
부여 이주설을 한 번 더 써먹는다면 백제에 협력했던 부여세력이 백제를 도와 서쪽을 평정하고
가야를 압박했으며, 신라를 제압한 후 가야의 도움으로 왜로 건너간 것이 아닐까?
이들은 왜로 건너가 지배층을 형성하였고 백제, 가야와 친밀한 관계를 계속 유지하였는데,
나중에 일본 서기를 기록할 때, 이 이주세력을 왜로 표기함으로 인해 발생한 혼란이 임나일본부설이 아닌가 한다.
일본에 철기가 보급되고 기마병이 나타나는 시기가 이 시기라 하니 아주 허황되지만은 않을 듯하다.
근초고왕이 칠지도와 칠자경을 왜에 선물한 것도 이 이주 세력에 대한 고마움이나 친밀함의 표현이라면 이해가 간다.
과거의 기록들이 부실하고 사서마다 모순되는 내용이 많아 실체적 진실을 알기 어려운 것이 아쉽다.
[이 게시물은 마루밑다락방님에 의해 2015-01-13 13:28:57 아온에서 복사 됨] http://hisking.com/bbs/board.php?bo_table=kyeong110&wr_id=2902
-
[마루밑다락방의 서고] 초승에 뜨는 달은 ‘초승달’이 옳다. 물론 이 단어는 ‘초생(初生)’과 ‘달’이 합성한 경우이나, 어원에서 멀어져 굳어진 경우 관용에 따라 쓴다는 원칙에 따라, ‘초승달’이 올바른 표현이다. 마치 ‘폐렴(肺炎), 가난(艱難)’ 등과도 같은 경우이다.2015-05-25
-
[인문학] 아일랜드... 예이츠의 고향. 가장 늦게 도달한 기독교(카톨릭)에 가장 심취하였고 중세 수도원 운동이 크게 부흥하여 역으로 대륙에까지 영향을 미쳤던 곳... 중국보다 성리학에 더 미쳤던 한국..자본주의의 실험재료가 되어, 자국의 식량이 부족하여 백성은 굶어죽는데도 영국으로 식량을 수출해야 했던 나라. 맬더스 인구론의 근거가 됐었고.. 영국의 식민지였으며 분단의 아픔을 격고 있는 나라.. 참 한국과 비슷한 점이 많은 나라입니다.2015-04-16
-
[인문학] 러셀... 현대의 소크라테스...2015-04-15
-
[인문학] 비극적이고 치명적인 대가를 치른 후였다.-------------전이겠지요.2015-04-09
-
[인문학] 신영복 교수... 진정 겸손한 글을 쓰는 분이지요.소외 당한 자, 시대의 약자들에 대한 이해가 깊은 분이고. 그들을 대변 또는 위로할 수 있는 몇 안되는 작가들 중의 하나이지요.2015-04-08
-
[인문학] 좋군요....2015-04-07
-
[인문학] 과학이 본연의 임무대로 오류들을 이리저리 쳐내가다 보니 알맹이가 하나도 안 남은 형국이되었습니다. 그러니 과학 때문에 목적을 상실했다는 말이 나왔고, 도구에 불과한 과학이 미움을 받는 묘한 지경이 되었습니다만... 그게 과학의 잘못은 아니지요. 만들어진 요리가 맛이 없는게 잘드는 칼의 잘못입니까? 재료가 형편없었던 까닭이지요.2015-04-05
-
[인문학] 물론 ‘목적 없는 세계’라는 아이디어가 ‘신앙의 부재’와 반드시 일치할 필요는 없겠지만, 어떤 목적으로 움직이는지 회의를 주는 세계는 신앙심을 약화시키는 무신론을 철저히 방조하고 있음엔 틀림없는 것 같다. -------------음... 아직 옛날 습관이 남아있는 어투이군요...전지전능의 무한자는 인간이 알 수 있는 대상이 아닙니다. 즉 불가지의 존재이지요. 이 불가지의 존재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있는지도 당연히 불가지입니다. 과학은 이 불가지의 세계를 다루지 않습니다. 그랫다가는 오컴에게 면도날로 난도질 당합니다. ㅋㅋㅋ2015-04-05
댓글목록1
마루밑다락방님의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