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사] 신라 : 제 24 대 진흥왕
2015-04-13 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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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신라의 대표적인 정복군주로서,
지증왕의 손자이자 법흥왕의 조카 겸 외손자라는 복잡한 신분을 가지고 있다.
아버지 갈문왕 입종이 조카딸과 결혼하는 바람에 이런 이상한 신분이 되었으나
고대 신라에서 이 정도면 양호한 편이고, 당시에는 왕위 계승의 정통성을 확보하는 순기능도 있었을 것이다.
540년 법흥왕이 사망하여 15세의 나이로 왕위를 이었다. 7세라는 설도 있지만 15세가 대세인 듯하다.
15세라 해도 아직 어린 나이이므로 당연히 태후가 섭정을 하였는데,처음 1년은 법흥왕의 왕후인 보도 태후가 하였고,
그다음은 무려 10년 동안 친모인 지소태후가 섭정을 하였다 한다.
참나, 명 짧은 왕이면 벌써 죽었겠다. 지소태후의 권력욕이 대단하였나 보다.
어쨌든 26세가 되어서야 친정을 할 수 있었고.재위 6년에 거칠부에게 국사를 편찬하게 하였으며,
9년, 고구려 양원왕이 백제의 독산성을 공격하자, 나제동맹에 따라 정예병을 파견하여 고구려 군대를 박살내었다.
11년에는 동맹 백제와 함께 고구려를 공격하여 한강 상류의 10개의 군을 얻었고, 백제는 하류의 6개 군을 얻었는데,
내친 김에 평양까지 진격하자는 어찌 보면 타당한 백제의 제의를 거절하고, 대신 고구려와 타협하여 점령한 지역을 영토로 인정 받았다 한다.
백제는 당연히 길길이 뛰었을 것인데,뭐에 열받았는지는 몰라도, 똥 뀐 놈이 성낸다고 이번에는 백제를 향해 칼을 뽑았다.
당황한 백제는 서둘러 무마를 하였고 그렇게 친정 첫 해를 마무리 하였다.
이듬해에는 고구려를 단독 공격하여 10개군을 취하였다.
이번에는 고구려가 어이 없었을 것이다.
전쟁에 자신감이 붙었는지 14년에는 백제의 영역인 한강 하류 지역을 마져 빼았아 한강 유역을 통째로 삼켰다.
이로서 신라는 생산기지 낙동강 유역과 더불어 생산력이 높은 한강 유역까지 확보하게 되어 강국의 발판을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중국 직통 노선을 확보하여 경상도에 고립되어 있던 처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해에 성왕이 보낸 백제의 왕녀를 후궁으로 삼았다 하는데,
성왕이 무슨 생각으로 이미 적이된 신라에 결혼 동맹을 제안하였는지는 모르나,
별 성과는 없었던 모양으로 15년에 관산성에서 크게 한판 붙게 되었다.
백제로서는 회심의 일격을 가한 것이었으나, 황당하게도 성왕이 병사들에게 사로잡혀 목까지 짤리는 바람에 참패하였고,
신라와 불구대천의 원수가 되고 말았다.
믿거나 말거나인 일본서기에 따르면 이때 잘린 성왕의 목을 왕궁 계단 밑에 묻어 사람들이 밟고 다니게 했다는데...
배신은 지가 먼저 해놓고, 왜 그리 성왕을 미워했는지는 의문이나, 그렇다 한다.
이후 신라는 북진하여 영토를 함경도 남부까지 크게 확장하였다.
16년에는 점령한 영토를 직접 순시하며 각지에 순수비를 세웠는데, 촌놈이 출세한 꼴이니 흐믓하였을 것이다.
현재 남아있는 진흥왕 순수비는 북한산, 창녕, 황초령, 마운령 등 4개이다.
18년에 국원을 소경으로 삼았다. 후일의 중원경이다.
23년에 백제가 침입해와 호되게 혼내주었고,미실의 연인 사다함을 보내 대가야를 복속시키며 가야를 한반도에서 지웠다.
27년에 찌질이 동륜을 왕태자로 삼았고 황룡사를 준공하였다.
33년에 동륜이 아버지의 후궁들과 사통하다 개에 물려죽었는데,
이 사건에 문제의 여인 미실이 깊숙이 관여되어 있었다 한다.
35년에는 왕후 사도가 대리청정을 하였고 다음해에는 궁주 미실이 잠시 대리청정 하였다.
미실...
위서의 논란이 있는 화랑세기에만 나오는 데,
당대의 실력자 들을 모두 치마폭에 가두고 권력을 휘둘렀다는 정체가 모호한 여인이다.
37년에 원화제도를 실시하였으나 남모와 준정이 난리를 치는 바람에 폐지하고 화랑제를 실시하였다.
동륜의 동생 사륜이 대리 청정하였고 이후 졸하였다. 향년 51세.
연호는 개국, 태창, 홍제 등이었다.
고구려의 광개토대왕, 백제의 근초고왕에 상응하는 신라의 대표주자이나
당시 고구려는 돌궐의 공격을 막느라 신라의 공격에 대응할 여력이 없었고, 백제는 뒤통수를 맞은 것이었이므로,
진흥왕은 위의 두 정복군주에 비해 압도감이 한참 떨어진다.
좀 얍삽하다는 느낌도 들고, 위대하다기 보다는 운이 억세게 좋은 양반이라는 생각도 들지만,
어찌 되었건 한강유역을 확보하고,가야를 완전히 병합하였으며, 화랑 제도를 실시하는 등 후대를 위해 많은 업적을 남긴 군주였다.
늦게 배운 도둑질에 날새는 줄 모른다고 가장 늦게 불교가 전파된 신라에서 불교 사랑이 가장 심하였는데,
이 양반도 불교에 심취하여 자신의 이름을 불교식으로 지었고 두 아들에게도 불교식 이름을 주었음은 물론 자신을 전륜성왕과 동일시 하였다.
황룡사등 많은 절을 지었고 말년에는 법흥왕처럼 출가하여 머리를 깎고, 승복을 입고 다녔다 한다.
불교를 이리 사랑하면서도 색계에는 신경을 쓰지 않아 미실을 비롯한 수 많은 후궁을 거느려 왕실의 족보를 복잡하게 만들었다.
어려서는 어머니의 치맛바람에 고생을 했고 말년에는 마누라들의 등쌀에 기를 펴지 못했던 진흥왕,
그 복잡한 가정사 속에서도 이만한 업적을 이룬 점은 대단하다고 하겠다.
가야의 유민 우륵 등을 받아들여 문화 창달에도 힘을 기울였다.
우륵이 살면서 가야금을 연주하였다는 충주 탄금대... 가볼만 하다.
지증왕의 손자이자 법흥왕의 조카 겸 외손자라는 복잡한 신분을 가지고 있다.
아버지 갈문왕 입종이 조카딸과 결혼하는 바람에 이런 이상한 신분이 되었으나
고대 신라에서 이 정도면 양호한 편이고, 당시에는 왕위 계승의 정통성을 확보하는 순기능도 있었을 것이다.
540년 법흥왕이 사망하여 15세의 나이로 왕위를 이었다. 7세라는 설도 있지만 15세가 대세인 듯하다.
15세라 해도 아직 어린 나이이므로 당연히 태후가 섭정을 하였는데,처음 1년은 법흥왕의 왕후인 보도 태후가 하였고,
그다음은 무려 10년 동안 친모인 지소태후가 섭정을 하였다 한다.
참나, 명 짧은 왕이면 벌써 죽었겠다. 지소태후의 권력욕이 대단하였나 보다.
어쨌든 26세가 되어서야 친정을 할 수 있었고.재위 6년에 거칠부에게 국사를 편찬하게 하였으며,
9년, 고구려 양원왕이 백제의 독산성을 공격하자, 나제동맹에 따라 정예병을 파견하여 고구려 군대를 박살내었다.
11년에는 동맹 백제와 함께 고구려를 공격하여 한강 상류의 10개의 군을 얻었고, 백제는 하류의 6개 군을 얻었는데,
내친 김에 평양까지 진격하자는 어찌 보면 타당한 백제의 제의를 거절하고, 대신 고구려와 타협하여 점령한 지역을 영토로 인정 받았다 한다.
백제는 당연히 길길이 뛰었을 것인데,뭐에 열받았는지는 몰라도, 똥 뀐 놈이 성낸다고 이번에는 백제를 향해 칼을 뽑았다.
당황한 백제는 서둘러 무마를 하였고 그렇게 친정 첫 해를 마무리 하였다.
이듬해에는 고구려를 단독 공격하여 10개군을 취하였다.
이번에는 고구려가 어이 없었을 것이다.
전쟁에 자신감이 붙었는지 14년에는 백제의 영역인 한강 하류 지역을 마져 빼았아 한강 유역을 통째로 삼켰다.
이로서 신라는 생산기지 낙동강 유역과 더불어 생산력이 높은 한강 유역까지 확보하게 되어 강국의 발판을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중국 직통 노선을 확보하여 경상도에 고립되어 있던 처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해에 성왕이 보낸 백제의 왕녀를 후궁으로 삼았다 하는데,
성왕이 무슨 생각으로 이미 적이된 신라에 결혼 동맹을 제안하였는지는 모르나,
별 성과는 없었던 모양으로 15년에 관산성에서 크게 한판 붙게 되었다.
백제로서는 회심의 일격을 가한 것이었으나, 황당하게도 성왕이 병사들에게 사로잡혀 목까지 짤리는 바람에 참패하였고,
신라와 불구대천의 원수가 되고 말았다.
믿거나 말거나인 일본서기에 따르면 이때 잘린 성왕의 목을 왕궁 계단 밑에 묻어 사람들이 밟고 다니게 했다는데...
배신은 지가 먼저 해놓고, 왜 그리 성왕을 미워했는지는 의문이나, 그렇다 한다.
이후 신라는 북진하여 영토를 함경도 남부까지 크게 확장하였다.
16년에는 점령한 영토를 직접 순시하며 각지에 순수비를 세웠는데, 촌놈이 출세한 꼴이니 흐믓하였을 것이다.
현재 남아있는 진흥왕 순수비는 북한산, 창녕, 황초령, 마운령 등 4개이다.
18년에 국원을 소경으로 삼았다. 후일의 중원경이다.
23년에 백제가 침입해와 호되게 혼내주었고,미실의 연인 사다함을 보내 대가야를 복속시키며 가야를 한반도에서 지웠다.
27년에 찌질이 동륜을 왕태자로 삼았고 황룡사를 준공하였다.
33년에 동륜이 아버지의 후궁들과 사통하다 개에 물려죽었는데,
이 사건에 문제의 여인 미실이 깊숙이 관여되어 있었다 한다.
35년에는 왕후 사도가 대리청정을 하였고 다음해에는 궁주 미실이 잠시 대리청정 하였다.
미실...
위서의 논란이 있는 화랑세기에만 나오는 데,
당대의 실력자 들을 모두 치마폭에 가두고 권력을 휘둘렀다는 정체가 모호한 여인이다.
37년에 원화제도를 실시하였으나 남모와 준정이 난리를 치는 바람에 폐지하고 화랑제를 실시하였다.
동륜의 동생 사륜이 대리 청정하였고 이후 졸하였다. 향년 51세.
연호는 개국, 태창, 홍제 등이었다.
고구려의 광개토대왕, 백제의 근초고왕에 상응하는 신라의 대표주자이나
당시 고구려는 돌궐의 공격을 막느라 신라의 공격에 대응할 여력이 없었고, 백제는 뒤통수를 맞은 것이었이므로,
진흥왕은 위의 두 정복군주에 비해 압도감이 한참 떨어진다.
좀 얍삽하다는 느낌도 들고, 위대하다기 보다는 운이 억세게 좋은 양반이라는 생각도 들지만,
어찌 되었건 한강유역을 확보하고,가야를 완전히 병합하였으며, 화랑 제도를 실시하는 등 후대를 위해 많은 업적을 남긴 군주였다.
늦게 배운 도둑질에 날새는 줄 모른다고 가장 늦게 불교가 전파된 신라에서 불교 사랑이 가장 심하였는데,
이 양반도 불교에 심취하여 자신의 이름을 불교식으로 지었고 두 아들에게도 불교식 이름을 주었음은 물론 자신을 전륜성왕과 동일시 하였다.
황룡사등 많은 절을 지었고 말년에는 법흥왕처럼 출가하여 머리를 깎고, 승복을 입고 다녔다 한다.
불교를 이리 사랑하면서도 색계에는 신경을 쓰지 않아 미실을 비롯한 수 많은 후궁을 거느려 왕실의 족보를 복잡하게 만들었다.
어려서는 어머니의 치맛바람에 고생을 했고 말년에는 마누라들의 등쌀에 기를 펴지 못했던 진흥왕,
그 복잡한 가정사 속에서도 이만한 업적을 이룬 점은 대단하다고 하겠다.
가야의 유민 우륵 등을 받아들여 문화 창달에도 힘을 기울였다.
우륵이 살면서 가야금을 연주하였다는 충주 탄금대... 가볼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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