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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사] 신라 : 제 26 대 진평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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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은 백정
현대의 어감으로는 좀 거시기 하지만... 석가모니 아버지의 이름이라 한다.
왕후의 이름은 마야 .. 부처의 모친 이름이고
동생들의 이름은 백반, 국반... 무슨 음식점 메뉴 같지만 모두 부처의 숙부들 되시겠다.
할아버지는 전륜성왕, 아버지는 전륜성왕의 세째 아들...
이제 아들만 낳으면 대망의 석가모니가 태어나 불국토가 완성 되는데,
부처님도 민망했던지 아들은 안 주고 딸만 줄줄이 주었다.
천명, 덕만, 그리고 실재를 의심받는 전설의 공주 선화.
아들이 없어 비록 부처는 못 만들었어도 기왕에 만든 스펙이 아까웠는지,
진평왕은 이들을 성골로 만들었고, 딸에게 왕위를 물려주는 기염을 토하였다.
하지만 뒤를 이은 선덕여왕이 자식을 생산하지 못하여 성골은 단절되었고, 짝퉁 성골 즉 진골이 신라를 지배하게 된다.
태종무열왕 김춘추는 전륜성왕 막내아들의 손자이므로 석가모니의 가계와는 직접관계가 없어 진골이 되는 모양이다.
왕즉불 사상을 이용하여 골품제도를 만든 진평왕...기가찰 일이다.

한반도 구석에 짱 박힌 소국의 왕 주제에 부처의 아비네, 성골이네 하는 꼴이 갖잖아 보이기도 하고,
중국을 비롯한 주변의 강국들에게 얼마나 우습게 보였을런지, 괜히 민망해지기도 하지만,
그렇게 주장한 데에는, 그 시대, 그 동네 나름의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고모와 조카가 결혼하고 할머니 뻘의 여인과 동침하는 등 족보가 난장판이라, 
위 아래,원근 등 계통을 파악하는 것이 불가능했던 당시의 신라 왕실 상황에 넌더리가 난 진평왕이,
자신의 직계만으로 성골을 만들어 뭔가 질서를 잡으려 한 것이 아닐까?
대부분 왕족이고 친척이니 웬만한 신분으로 질서를 잡아 권위를 세우기는 어렵고... 

그래서 부처의 가계를 복사하여 그대로 적용을 시킨 것 같은데,
무슨 사이비 종교집단 같아 우습기도 하고, 나중에 부작용이 만만찮은 꼴통제도가 되긴 하지만,
모계와 샤머니즘의 전통이 강하고 국가의 응집력이 가장 약했던 당시의 신라에서는,

이러한 방법으로 왕실을 신성하게 만듦으로서 왕권을 위협할 수 있는 여타의 귀족세력들과 차별화를 꾀하고 정치의 불안을 극복하여,

나라의 힘을 하나로 모으는 순 기능을 하였을 것이다.

그 덕에 선덕, 진덕여왕 대의 이어지는 위기들을 무사히 극복하고 삼국통일까지 할 수 있지 않았을까?

진평왕은, 석연찮은 이유로 폐위 당하고 죽은 진지왕의 뒤를 이어
579년 왕위에 올랐으나, 이후 오년 동안은 진지왕의 모후인 사도태후 박씨가 섭정을 하였다.
아들을 쫓아내고 권력을 잡았다는 이야기인데....
화랑세기에는 미실에게 이용만 당하는 정신 나간 아줌마처럼 나오지만, 진짜 냉정한 정치가는 사도태후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도 든다.
왕은 재위 2년째에 신궁에 스스로 제사를 지내었고, 이찬 후직을 병부령으로 삼아 군사권을 장악하였다 하므로, 

이 시기에 할머니를 제낀 것같고,이후 기회가 있을 때 마다 각종 관서를 설치하는 등 중앙관제를 개혁하였다.
...진평왕의 정치력이 상당하였음을 알 수 있다.
 

6년에 연호를 건복으로 바꾸며 명실상부한 친정을 하였고,
15년에 명활성과 서형산성을 고쳐 쌓아 방비를 강화했으며 지방 제도를 개혁하는 등 외침에 대비하였다.
24년, 백제의 아막성 공격을 시작으로 고구려, 백제의 공격에 끊임없이 시달렸고 성도 자주 빼앗겼다.
결국 영토는 진흥왕 이전으로 축소되다시피 하였으나 한강유역 만큼은 목숨을 걸고 지켰고, 

중국의 왕조들에 매달려 생존을 도모하였다.
외교의 결과인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수,당의 협조를 받아 고구려를 견제하기도 하였다.

31년 모지악 아래의 땅이 9달이나 불에 탔다는데. 소규모 유전이었을 것이다.
재위 50년째에는 빈번한 외침과 자연재해로 백성들의 고초가 극심하여 자식을 내다파는 일도 있었고,
51년에는 모처럼 고구려를 공격, 김유신의 활약에 힘입어 낭비성을 함락시켰다.
53년에는 칠숙과 석품의 반란을 조기에 진압하였으며,
이듬해에 사망하여 54년의 길고 긴 재위를 마쳤다.

부처를 낳아 불국토를 이루겠다는 황당한 망상으로 골품제도를 만들었고,
진흥왕의 얍삽한 영토 확장으로 원수가 된, 고구려 백제에 끊임없이 시달리는 바람에,
수,당에 저자세 굴욕 외교가 무엇인지를 제대로 보여준, 꼴불견의 이미지이지만,
문란한 왕실 여인들의 준동을 다스리며 중앙관제와 지방제도를 개혁하였고,
원광법사로 상징되는 불교세력을 적절히 이용하였으며, 화랑도를 국가의 간성이 되게 하였다.

태어나면서부터 얼굴이 기이하고 몸이 장대하였으며, 의지가 깊고 식견이 명철하였다고 한다.
어찌나 거구였고 힘이 장사였는지 한 걸음에 계단 두 개를 한꺼번에 부숴버렸다는 전설도 있고,
황룡사 9층 목탑, 황룡사 장육존상과 더불어 신라의 삼보로 칭해지는 하늘이 준 옥대를 차고 다녔다 한다.
나름 위엄과 권위가 있는 왕이었을 것이다.

선화공주 전설은 실재의 사건이라기 보다는,
불교의 힘을 신라에 모아 불국토를 이루겠다는 진평왕의 구상에 심기가 불편해진, 
또 다른 불교국가인 백제가 만들어낸 역선전일 가능성이 크다.
불국토 신라의 상징인 고귀한 선화공주가 백제로 갔다는 이야기는
신라에 모였던 불교의 힘이 백제로 빠저나간 것으로 해석할 수 있어,고생은 신라가 하고 과실은 백제가 가져갔다는 의미가 된다.
가소로운 이야기이기는 하나 설화의 의미가 현대와 달랐던 고대에는 상당한 힘을 발휘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진평왕 시기의 일화 중 비형랑 설화를 빼놓을 수 없는데,비형랑은 진지왕이 저승에서 돌아와 만든 자식으로 진평왕의 4촌 동생이 된다.
출생이 찝찝하긴 하지만 어쨌든 사촌동생이므로 궁에서 살게 하고 관직을 주었는데,
이놈이 밤마다 궁을 빠져 나가 귀신과 놀았고, 귀신을 부려 하룻밤 사이에 다리를 완성하기도 하였으며,
길달이라는 귀신을 조정에 천거하였고, 생사람의 양자가 되게하였다 한다.
그런데 이 길달이란 놈이 뭐가 안맞았는지, 여우로 변해 도망을 갔는데,
그러자 비형랑이 다른 귀신을 시켜 이놈을 잡아 죽였고, 이 꼴을 본 다른 귀신들은 비형랑을 두려워하여 모두 달아났다 한다.
불국토에서 웬 귀신인가 싶기도 하고 도데체 뭘 의미하는 것인지 궁금해지기도 하지만,
잘 모르겠고....
그저 당시의 어두운 면을 나타내는,현대의 조폭같은 음지의 인간들을 상징하는 설화 정도로 받아들이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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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5-11 07:3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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