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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사] 신라 : 제 31 대 신문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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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은 정명, 자는 일소

나당전쟁이라는 승부수를 통해 삼한 통일을 완수한 문무왕의 아들로서,

왕권을 강화하고 제도를 정비하여 8세기 중엽까지 지속되는 신라의 최전성기를 연 군주이다.

681년 왕위에 올라

선왕의 장례가 끝나자마자 귀족세력을 압박하였고, 이에 반발하여 반란이 일어나자

장인을 포함한 상당수의 귀족들을 모조리 엮어 숙청하였으며 왕비까지 내쫒아 버렸다.

고려의 광종이나 조선 태종의 롤 모델로 부족함이 없었을 것이다.

반란 진압 후에는 장군 6명을, 왕궁경호를 담당하는 시위부의 수장으로 배치하여 안전을 도모하였고 왕권도 강화하였다.

짧은 시간 내에 반란을 진압하고 후속조치까지 깔끔하게 마무리한 것으로 보아, 친위 쿠데타가 아닌가 하는 의심도 들지만,

아무튼 이렇게 통일과정에서 비대해진 귀족세력들을 정리한 후,

즉위 이듬해에 신궁에 제사 지내었고, 국학을 설치하였다.

일반적으로 국학 설치는 유교를 국가의 통치 이념으로 삼겠다는 신호와 같은 것이므로, 강한 왕권이 전제되어야 한다.

처음 설치한 왕은 진덕여왕이었으나, 진덕여왕은 얼굴마담같은 왕이었기에 별 기능을 하지 못하였을 것이고...

실질적으로 신문왕이 처음 설치 운영한 것으로 보아 무방하다.

3년차에 새 장가를 갔고, 보덕국 왕 안승에게 김씨 성을 하사하여 경주에 살게 하였으나,

이듬해에 안승의 일족이 반란을 일으킨 것을 기화로 보덕국을 없애버리고 한반도 전체를 직접 지배하였다.

7년에 태조대왕 (성한왕?, 미추왕?), 진지왕, 김용춘, 무열왕, 문무왕을 모시는 5묘의 제도를 정비해 왕통을 확립하였고.

수조권만을 행사할 수 있는 문무 관료전을 최초로 지급하였으며,

2년 뒤, 노동력 징발이 가능한 녹읍을 폐지하는 엄청난 일을 하였다.

692년 재위 12년 만에 6살짜리 효소왕을 남겨두고 잚은 나이에 요절하여 아쉬움을 남겼다.

 

신문왕의 재위는 왕권강화로 요약할 수 있다.

반란을 이용해 귀족들의 힘을 꺾은 후 강한 왕권을 바탕으로 나라의 제도를 정비해 나갔다.

군제인 9서당의 틀을 만들었고, 5단계 관직제도를 완성시켰으며, 9주 5소경의 지방제도를 확립했다.

국학을 설치하여 유교이념을 도입하였고

녹읍을 폐지하여 진골 귀족들을 월급을 받는 일반 관료로 만들었다.

신문왕은 재위기간 대구 천도를 기획했었다 하는데, 비록 신하들의 반대로 성사되지는 못했으나

왕권강화에 대한 신문왕의 집착이 어느 정도였는가를 보여준다 하겠다.

나당전쟁 이후 처음으로 당과 정상적인 외교관계를 재개하였고,

무열왕의 묘호인 태종이 이세민의 묘호와 같아 불경이니 바꾸라는 당의 요구를 거부하여, 나름의 자존심도 챙겼다.

창업보다 어렵다는 수성을 훌륭히 수행하여, 문무왕과 함께 후대가 감사할 만한 업적을 많이 남긴 군주이다.

   

전설에서, 용이 된 문무왕에게 만파식적을 받은 왕이며

장미와 할미꽃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화왕의 이야기를 설총에게서 듣는 왕도 신문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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