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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사] 신라 : 제 43 대 희강왕, 제 44 대 민애왕, 제 45 대 신무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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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강왕 김 제륭

 

원성왕의 증손으로 김 헌정의 아들이며, 흥덕왕 사후, 숙부 김 균정과 왕위를 놓고 대립하였다.

균정은  아들인 우징, 조카 예징 그리고  무열왕계인 김 양의 지지를 받았고, 제륭은 시중 김명, 아찬 이홍, 그리고 배훤백의 후원을 받았다

양자는 격렬한 전투를 벌였고 그 와중에 균정이 활에 맞아 죽으면서 제륭이 승리할 수 있었다.

 

836년 말, 왕위에 올라

김명을 상대등에, 이홍을 시중에 임명하며 정부를 구성하였으나,

뭘 해보기도 전인 838년에 공신 김 명과 김 이홍의 쿠데타를 만나 실각하였다.

희강왕은 측근 왕족들과 귀족들이 살해되어 더 이상 희망이 없자, 궁궐에서 목을 매어버렸다.

1년 남짓의 재위...참으로 덧없는 일생이었다.

 

희강왕이 우리 역사에 몇 안되는 자살한 임금들의 대열에 합류한 후,

피가 피를 부르는 복수극이 전개되어, 단명하는 왕들이 속출하는데...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직계를 중용했던 원성왕... 이런 일들을 상상이나 했을까?

 

 

민애왕 김 명

 

흥덕왕 10년 김균정이 상대등으로 취임할 때 균정의 아들 우징의 후임으로 18세의 나이에 시중이 되었다.

흥덕왕이 유력한 두 파의 세력균형을 위하여 나름 배려한 모양이나, 별효과는 없었는지

흥덕왕의 사후, 왕위 계승을 둘러싼 격렬한 전투가 발생했고

김 명은 아찬 김 이홍과 함께 균정을 주살하고 제륭을 옹립하였다.

이 때 균정의 아들 우징은 김 양과 함께 청해진으로 도망가 장보고에게 의탁하였다.

 

희강왕의 즉위 후, 상대등이 되었고,

김 우징이 장보고의 비호 아래 칼을 갈고 있는 상황에서,

혁명동지 김 이홍과 함께 쿠데타를 일으켜 희강왕을 자결하게 하였다.

 

838년 그토록 원하던 왕위에 올랐는데, 득의의 순간은 잠깐이었다.

김 우징이 드디어 칼을 뽑아 평동장군 김 양을 앞세우고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김 양은 파죽지세로 김 민주의 정부군을 궤멸시키며 전라도 일대를 휩쓸었고 이듬해에 대구까지 진출하였다.

민애왕은 식겁하여 금군을 포함한 10만 규모의 토벌군을 파견하였으나 대패하였고, 이어 서라벌까지 함락되었다.

민애왕은 별궁으로 도망가 숨었으나 김 양에게 발각되어 처형당하였다... 꿩새끼도 아니고..

839년의 일이었다.

이 양반도 재위 기간은 1년 정도.

 

민애왕은 누이가 둘이 있었는데

하나는 희강왕의 비였고

나머지 하나는 김 우징 즉 신무왕의 비였다 한다.

....가족들끼리 참 잘하는 짓이다...

 

 

신무왕 김우징

 

김 균정의 아들로 즉위 전 여러차례 시중자리에 오른 정권의 실세였으나

상대등이었던 아버지가 조카와의 왕위쟁탈전에서 전사하자,

김 주원의 자손 김 양과 함께 청해진으로 달아났다.

 

장보고의 후원과 김 양의 맹활약으로, 민애왕을 죽이고 839년 왕위에 올랐다.

...아버지의 복수도 마치고 왕위에 올랐으니 흐뭇하였을 것이다.

장보고에게 벼슬을 내리는 등 공신들을 치하하였고, 그동안 끊겼던 당과의 외교관계를 복원하는 등 의욕적으로 왕노릇을 시작하였으나,

바로 병이 들어 사망하였다.

재위기간은 6개월 남짓이었고, 사인은 종기였다고 한다.

허무하다 아니할 수 없다.

 

장보고에게 피신했을 때 장보고의 딸을 태자비로 삼겠다는 약속을 했다고 하는데...

너무 빨리 죽는 바람에 약속을 지키지 못했고 결과적으로 장보고의 명도 단축하고 말았다.

 

왜 신무라는 시호를 붙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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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5-11 07:3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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