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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 고려 : 제 2 대 혜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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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 혜()
중국 놈들은 암군이거나 왕위를 빼앗긴 임금을 모욕하기 위해 시호에 이 글자를  사용하는데, 한심한 인간 쯤의 의미가 있다고 한다. 충혜왕이 대표적인 경우이다.

이 수준을 넘어가는 인간 말종에게는 양()자를 쓰는데

불효막심, 허랑방탕, 음란무도, 후안무치, 가렴주구, 인명경시... 등등 온갖 나쁜 짓을 다 했다는 뜻으로,
고구려를 대대적으로 공격했던 수양제 양광이 이 경우에 해당한다.

양광의 원래는 시호는 명이었으나, 수나라의 멸망 후 이 인간에게 원한이 많았던 당의 건국 세력들이 양이라고 불러 비하하였는데,

이렇게 비하한 데에는 전 황조를 깎아내려 반란을 일으킨 자신들의 정당성을 확보하고자 하는 정치적 의도가 분명히 있었을 것이나틀린 소리도 아니었으므로 후대의 공감을 얻어 시호처럼 되어 버렸다고 한다.

혜종은 태자 시절부터 기질이 호탕하고 도량이 넓었으며, 지혜와 용맹이 뛰어났다고 하는데,
이 멋진 태자가 어찌하여 2년 남짓밖에 왕 노릇을 못했으며, 죽어서도 혜자 시호를 받아야 했을까

이름은 무

259녀에 달하는 왕건의 자손 중 맏이이다.
나주 미인 장화왕후 오씨의 아들로서 태조의 의지로 박 술희 등의 도움을 받아 태자에 책봉되었고
고귀한 신분임에도 통일 전쟁에서 맹활약하여 일등공신이 되기도 하였다.
장자 상속에 대한 태조의 신념은 통일 후에도 변함이 없어, 후계구도에 흔들림이 없었고, 943년 태조가 26년간의 재위를 마치고 졸하자 그 유명을 받아 즉위하였다.
명분이나 자질, 나이, 태조의 심중 등등, 무엇 하나 결격 사유가 없는 완벽한 후계자로서 왕위에 올랐으나, 막상 왕 노릇하기는 쉽지가 않았다.
조정은 이미 너나없이 외척, 공신인 거대 호족들에 의해 장악되어 있었고, 나름의 지분을 가진 이들은 방자한 행동을 넘어 불경도 서슴지 않았다.

자신들의 군주를 얼굴에 주름살이 많다고 주름살 대왕이라고 부르는가 하면

그 주름살이 많은 이유가 태조와 오씨 부인이 정사를 나눌 때 돗자리에 질외 사정을 했기 때문이라는 망측한 소문까지 퍼뜨렸다.

태조의 호족 우대 및 화합 정책의 부작용이자, 창업국가의 모순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상태로서이러한 기가 막힌 상황을 타파하고 왕권을 확립하기 위해서는 대대적인 숙청이 필요한데

지지기반이 미약했던 혜종에게는 택도 없는 일이었다.

당시 혜종에게 힘이 되어 줄 수 있는 세력이라면, 적몰되다시피 한 외가는 논외고 처가도 군사력이 별 볼일 없었으므로, 위대한 아버지의 마지막 배려인 고명대신들 정도였는데,

태조는 경기도 광주의 대호족인 왕 규와 우직한 친위 무장 출신의 박 술희에게 유명을 남겨, 애틋한 연인의 소생이자 맏아들인 혜종의 안위를 부탁하였다.

왕 규는 수도 인근에 세력을 가지고 있었고, 태조에게 두 딸을 시집보낸 외척이었으며, 왕씨를 사성 받은, 태조의 신임이 두터운 사람이었으나, 군사적 기반은 다른 호족들에 비해 약했다.
반면에 박 술희는 궁예의 호위병에서 출발하여 공신이 되고 대신이 된 사람이므로, 그 충성심과 군사적 능력만큼은 출중했을지 모르나대 호족들을 상대할 만한 힘이나 정치적 능력을 기대하긴 어려웠다.
태조는 장단점이 서로 다른 이 둘을 묶어 혜종을 보필하게 함으로서
아들이 안전도 보장받고, 세력 간에 조화가 이루어진 화합의 치세를 열어가길 바랐던 것으로 보인다.
자상한 아버지의 나름 고심에 찬 배려였으나, 태조와 달리 혜종이 상대해야 할 적들은 외부의 도적놈들이 아니라, 든든한 외가의 지원을 받는 같은 피를 나눈 이복형제들이었다.

이 내부의 적들은 다루기 까다로울 뿐만 아니라, 아버지 시대의 적들 보다 훨씬 더 위험하였다.

혜종의 최대 정적은 충주 유씨의 외손들인 왕 요(정종), 왕 소(광종) 형제였는데,
야심가였던 왕 요는 동생 왕 소와 함께, 왕의 대리인 격인 왕 규와 즉위 초부터 대립하였고. 1년여 만에 반란 혐의로 피소되었다.
일반적인 경우라면 이게 숙청의 신호탄이 되어 외척, 공신들이 줄줄이 멸족되고 왕권이 대폭 강화되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나멸족은커녕 나중에 광종이 되는 왕 소가 부마가 되었다.
이에 실망한 왕 규는 왕을 갈아치우고 자신의 외손인 광주원군을 세우기  위해, 박 술휘를 귀양 보내었으며 혜종에 대한 암살을 시도하였다고 한다.

첫 번째 암습 시, 혜종은  침실로 침입한 자객을 누구의 도움도 없이 맨손으로 때려잡으며 무골로서의 위용을 드러내었고두 번째에는 왕 규가 손수 군사들을 이끌고 벽을 뚫고 들어갔으나, 최 지몽의 제보를 받아 미리 피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도대체 왕 규는 왜 벽을 뚫고 들어갔을까?
암살은 은밀함이 생명인데, 군사들을 대동하고 궁궐을 침입한 것으로도 모자라, 벽을 뚫으며 소란을 피운다는 게 가당키나 한 일일까?
그리고 그 정도 소란을 피웠으면서도 왜 근처를 수색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제보자라는 최 지몽은 이후 행적으로 보아, 정종이 되는 왕 요의 측근이 분명한데 왜 이 자가 혜종을 도왔을까?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니, 그 이면은 다를 수 있으므로, 대강 추측해 보면,

왕규는 암살을 하러간 것이 아니라 구원하러 달려갔는데, 급한 마음에 거리를 단축하기 위해 벽을 뚫었고,
그 와중에 최 지몽을 만나 왕의 소재를 추궁하였다... 가 아닐까?

 

왕규가 역신이 아닌 충신이라는 전제 하에 상상을 해보면
혜종은 즉위 후 거대 호족 세력과 맞서기 위해, 왕규의 딸을 후궁으로 맞이하며 확실하게 자기 사람으로 만들었고,
고명대신이자 2대에 걸쳐 외척이 된 왕 규는 명분과 실리를 고루 갖춘 왕당파의 수장이 되었다.

왕규는 1년 정도의 준비 기간을 거쳐, 왕 요 형제의 반란을 고변하면서 본격적인 대리전을 시작하였으나, 충주 유씨에게는 역부족이었다.

이에 작전을 바꾸어 왕 소와 제휴하려 하였으나 이 또한 별 효력이 없었다.
그러는 사이 혜종은 연속되는 습격에 시달렸고, 박 술희를 내어 줄 수밖에 없는 상황에 몰리고 말았다.

이렇게  것이 아니었을까?

 

뭐가 어찌 되었건 이러한 상황 전개는 혜종에게 심대한 타격을 주었고 결국 병에 걸려 사망하고 말았다...는데,
극심한 스트레스에 의한 발병과 사망이라면 할 말이 없지만,
전쟁 영웅이자, 맨손으로 칼든 자객과 격투를 벌일 정도의 기백을 갖춘 혜종이 그렇게 쉽게 무너졌을까?
혜종은 말년에 아첨배들에 둘러싸여 있어서 신하들이 얼굴 보기도 힘들었다.....고 하는데,
적대 세력의 기록이므로 새겨서 읽으면,

아첨배는 왕규를 비롯한 왕당파를 의미할 것이므로, 왕당파가 혜종을 보호하기 위해 인의 장막을 쳤다는 뜻일 것이다.
이는 혜종이 그만큼 위험했었다는 뜻도 되므로, 그의 사망 또한 정상적인 죽음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

 

아무튼 혜종은 기 한번 펴보지 못하고, 시달리기만 하다가  24개월여의 짧은 재위를 마치고 945년 졸하였는데,

절손까지 되었다 하니, 안습이 아닐 수 없다

아버지의 배려가 부족했던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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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5-11 07:3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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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1

마루밑다락방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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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 태자가 왕까지 되어 잘 왕노릇 할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안타까운 왕이네.
근데 문득 생각난건데, 혜종의 일대기를 다룬 글이 나오면 꽤나 재미있을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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