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사] 고려 : 태조 왕건 (3)
본문
왕건은 그다지 강한 임금이 아니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며 세력을 키운 것이 아니라, 궁예가 고생 고생하며 만들어 논 것을, 한밤 중에 담을 넘어 삼켜버린 것이었기 때문에 친위 세력이 강할 수 없었고,
왕건의 쿠데타에 동조했거나 인정한 세력들도 진심으로 복종했다기 보다는 상황논리에 굴복한 것이었으므로 언제든 적으로 돌변할 수 있었다.
민심 또한 불안하여 쿠데타 이후 세금을 낮추고 흑창 을 설치하여 빈민을 구제하는 등 선정을 베풀었으나 철원은 여전히 불온하였다.
이렇게 위, 아래 모두 편치 않은 상황이었으므로, 이들의 반란 또는 분리를 막고 적극적인 협조를 받기 위해서는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였는데,
그 특단의 조치라는 것이 철원을 탈출하여 본거지인 송도로 도망을 가는 한편 장가를 많이 가는 것이었다.
29명의 부인이라는, 많은 혼인 동맹 이 필요했다는 것은 왕건의 입지가 그만큼 취약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겠다.
뭐 하나 맘 편한 구석이 없어서 전전긍긍하던 왕건은, 즉위 이후 서경을 개척하는 등 북진정책 을 꾸준히 시행하였는데,
이는 고구려의 뒤를 잇는다는 명분상의 이유도 있었겠으나, 정권의 배후세력 확보라는 보다 절박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시기에 느닷없이 전투 전문 집단이라 할 수 있는 발해의 유민 이 유입되어, 부실한 친위 세력을 보강해 주는 한편 통일 전쟁을 거들어주었는데,
이는 그간의 북진정책이 결실을 맺은 아주 획기적인 사건이라 할 수 있으나,
자고로 유, 이민 집단이 날 설고 물 설은 땅에 제대로 적응하기까지는, 태생적인 이질적인 요소로 인해 많은 불협화음이 발생하는 법이고, 용병 비슷하게 생활해야 했던 발해의 유민들이라면, 나라 잃고 남의 나라 땅에서 이게 뭐하는 짓인가 하는 자괴감을 비롯한 내부갈등 및 구성원들의 적응의 정도 차이 등등, 수없이 많은 문제들로 고용주인 왕건을 괴롭혔을 것이므로, 훌륭하기는 하나 다루기는 힘든 무기라고 할 수 있었다.
대 거란 정책을 보면 신생 소국 주제에 칼 한 번 맞대지 않은 이웃의 강대국에서 처음 온 사신을 귀양 보내고, 선물인 낙타를 만부교 에 매어 굶겨 죽이는 등 필요 이상으로 적대적이라는 느낌이 들고,
이 정신나간 짓은 나중에 거란의 대규모 침입의 명분이 되었는데,
당시 고려에서 거란과 원수였던 집단은 발해 유민이 유일하였고 나머지 세력들은 그저 강건너 불구경이나 하는 정도였을 것이므로,
친화력의 달인이고, 천년 신라를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주어담을 정도로 탁월한 외교적 감각을 소유한 왕건이 이러한 이상한 짓을 한 이유는 아마도 발해 유민들 때문이었을 것이다.
자세한 사연이야 잘 모르겠으나, 이러한 사실들은 발해 유민들이 그리 맘 편한 친위 세력이 아니었다는 것을 시사한다 하겠다.
호랑이 등에 올라탄 형국인 왕건은 살기 위해 무슨 짓이든 해야 했으나, 당대의 주류였던 한반도 호족들의 입장은 또 달랐다.
왕이 못될 바에는 누군가에게 의탁해야 하는데, 당시 선택지는 왕건과 견훤 두 곳이었다.
바로 이웃한 경우는 별 수가 없었겠지만, 양 세력의 경계지점에서 서식하고 있었거나, 상당한 힘으로 독자세력을 유지하고 있던 호족들은 선택을 해야 했는데,
선택은 복잡한 손익 계산이 따르므로 항상, 누구에게나 어려운 것이지만, 당시와 같은 난세에는 자신은 물론 처자식 그리고 일가친척들의 안녕과도 직결되므로 더욱 어려웠을 것이다.
선택지 두 곳이 모두 장단점이 있었고.
경순왕처럼 둘 사이에 결판이 날 때까지 기다릴 수 있는 운 좋은 경우도 있었으나, 대부분의 경우는 미리 선택을 해야 했을 것이다.
선택을 할 때 최우선적인 필요조건은 물론 생존이었겠으나 그에 못지 않게 투항 후 자신의 입지도 중요했을 것인데,
무장의 카리스마를 지닌 견훤에게 복속한다는 것은, 일인지배체제에 편입되어 부하 노릇을 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였을 것이고,
반면에 많은 호족들과 연합하여 세력을 키운 왕건은 주식회사의 대표 비슷하였으므로, 그에게 복속하는 것은 일종의 지분 투자와 같았을 것이다.
태생적으로 독립적 성향인 호족들에게는 왕건이 끌리는 투자처였을 것이나, 문제는 승리를 확신하기 어렵다는 것이었으므로, 위험자산이라 할 수 있는 왕건에게 투자했던 호족들은 고위험 고수익을 기대했을 것이다.
반면 견훤에 비해 열세였던 왕건 입장에서는 지분으로 배당이나 받으려 하거나, 여차하면 말을 갈아타려고 하는 소극적인 호족들 보다는,
지속적이고 적극적으로 생사고락을 같이 할 수 있는 호족들이 필요했을 것이다.
이러한 양측의 이해가 맞아 떨어진 결과가 혼인 동맹이 아니었을까?
그 자세한 내막은 당사자들이나 알 것이나, 뭐가 어찌되었건 왕건의 신종 투자 유치 정책은 견훤과 자웅을 겨룰 때는 여러 가지로 이로움이 많아서, 신라처럼 견훤이 피 흘리며 겨우 얻는 것들을 거의 거저 주우며 쾌재를 부를 수 있었으나,
막상 전쟁이 끝나고 통일이 되고 보니 보통 문제가 많은 게 아니었다.
무릇 투자는 이익을 남기기 위해서 하는 법이니,
지분을 가지고 있던 호족들은 통일 이후 기존의 세력을 더욱 키우고자 하였고,
왕의 장인이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던 자들은 자기 지역의 왕의 대리인 내지는 완벽한 영주 노릇을 하고자 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리되면 전국이 소 단위의 왕국으로 쪼개지는 꼴이 되므로 뭔가 대책이 필요했을 것인데,
다행인지 불행인지는 모르겠으나 29 이나 되는 외척 가문은 너무 많았기에 그 가치가 희석되어, 한 두 가문의 일방적인 독주를 막는 효과는 있었을 것이고, 여기에 기인제도 와 사심관제도 를 병행하여 호족들의 반란을 억제하였다.
하지만 이 정도로는 말 그대로 억제를 할 수 있었을 뿐, 중앙집권은 어림도 없었다.
산전수전 다 겪었고 그 능력 또한 출중했던 왕건의 생전에는 호족들이 왕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기에 그럭 저럭 나라가 굴러갔으나, 다음 대는 문제가 달랐다.
혜종의 모후가 되는 장화왕후 오씨와의 로맨스는 유명하긴 하지만,
본디 오씨 가문은 나주에서 그리 큰 호족이 아니었고, 그나마 견훤이 인생 후반기 대공세로 나주를 함락시켰을 때 집안이 적몰되다시피 하여, 세력은 고사하고 가문의 존립을 걱정해야 하는 지경이었다.
따라서 장화왕후와 그 소생인 왕자 무에 대한 지원은 언감생심이었다.
그런데도 왕건은 힘 있는 외척의 세도를 걱정하였는지, 아니면 맏아들을 제꼈다가 나라가 결단나버린 견훤의 교훈 때문이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장자상속을 일찌감치 선언하고 외가가 거덜나버린 무를 태자로 삼았는데.
25남 9녀라는 엄청난 자식들을 보유하고 있던 왕건에게 자식 하나 하나가 얼마나 큰 의미를 지니고 있었는 지는 알 수 없으나. 연애 결혼으로 태어난 자식이자 전체 맏아들이었으니 아무래도 더 애틋하였을 것이고,
타고난 무골로 몸도 튼튼하고 통일 전쟁 시 전공도 제법 되는지라, 아버지로서는 흐뭇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왕자들을 보유하고 있던 외척들은 생각이 달랐다.
나라가 안정되어 갈수록 왕권이 강화될 것이 분명하므로,
왕위를 둘러싼 충주 유씨를 비롯한 거대 세력들 간의 각축이 시작된 것이다.
이러한 왕위 계승전에서는 바람막이가 되어주고 대리전도 치러줘야 하는 외가의 힘이 절실하나 태자 무에게는 그러한 외가가 없었다.
아버지도 걱정이 되었는지 왕규와 우직한 골수 무장이자 충복인 박 술희에게 태자를 부탁한 모양이나 결과적으로는 너무 안일하였다.
왕위 계승은 왕권이 신성시 되는 안정적인 왕실에서도 툭하면 사단이 나는 아주 위험한 일인데,
왕권의 권위보다는 자신의 능력으로 기세등등한 호족들 간의 균형을 겨우 맞추고 있었던 안정과는 거리가 먼 개국 초창기의 상황에서,
제대로 된 대책을 세웠어도 시원찮을 판국에 그 정도 조치로 세상 경험이 많지도 않고 배경도 보잘 것 없는 젊은이가 무사히 왕노릇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는 것이 놀랍다.
늙어서 감각이 많이 무뎌졌었나 보다.
왕건은 훈요십조를 남겼다고 하는데, 자식 걱정하는 마음은 알겠으나 그런 몇줄의 글 보다는 좀더 실제적인 것을 남겨 주었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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