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사] 고려 : 서 희 그리고 거란의 1차 침입
본문
거란족.
이들은 4세기경부터 내몽고 일대에 거주했던 북방종족으로서, 선비족의 일파로 보이는데,
분파한 이래 중국과 초원의 패자, 그리고 고구려, 발해 사이에 끼여,
상황에 따라 이리 복속하기도 하고, 저리 채이기도 하는 참으로 한심한 신세였다.
이 안습의 종족에 서광이 비추인 것은 10세기 초였는데,
야율아보기라는 걸출한 지도자가 나타나 분열을 일 삼던 거란의 제 부족들을 대통합한 후, 세력을 키워,
초원을 통합하고, 발해를 멸망시켰으며, 북중국까지 집어삼키는 기염을 토하였다.
이들이 세운 요나라는 당대의 패자로 군림하였으나, 정복한 영토 모두를 실효지배하지는 못하였다.
고려는 무슨 배짱인지 건국초기부터 거란을 배척하면서 중국 세력과 화친정책을 실시하였고,
중원의 역대 패자들 또한 거란의 배후에 있는 고려의 지정학적 위치를 고려하여 협력적 관계를 맺어왔다.
이러한 상황에서, 유목국가의 한계를 극복하고 거란을 전성기로 이끈 영명한 군주 거란 성종이 982년 등극하여,
고려의 방파제 역할을 하던 정안국을 멸망시키고, 고려에게 사대의 예를 요구하였다.
고려는 개뿔도 없으면서 여전히 배짱을 부렸고...
송과 본격적인 대결을 앞두고 있던 거란은 배후에서 적대적인 정책으로 일관하는 고려가 신경쓰일 수밖에 없었다.
993년, 10월 소 손녕이 약 10만 정도의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공하여 봉산에서 고려군을 격파한 후 항복을 요구하였다,
고만 고만한 호족들끼리 툭탁거리는 것이 전쟁의 전부였던 고려에서, 본격적인 국제전은 조야의 혼을 빼 놓았고,
80만 대군이라는 소 손녕의 과장 광고는 진위 여부와 관계없이 전의를 상실케 하였다.
항전론은 아예 없었고, 전면 항복이냐 아니면 영토를 일부 내어주고 강화를 하느냐 하는,
항복론과 할지론이 서로 싸우는 실정이었는데,
서희는 항복도 할지도 없는 강화를 주장하였다 한다.
그러나 서 희의 외로운 주장은 메아리가 없었고, 서경은 결국 포기할 수밖에 없다는 분위기가 팽배할 때
마침 안융진에서 대도수와 유방이 승리했다는 낭보가 전해졌다.
전쟁이 장기화할 조짐을 보이자, 소 손녕은 더 이상 전투를 확대하지 않고 회담을 줄기차게 요구하였는데,
이러한 상황 전개는 서 희의 주장에 힘을 실어 주었고, 조정은 드디어 회담에 응하기로 공론을 모았으나,
죽을지도 모르는 회담에 대표로 나갈 신료들은 없었다.
결국 서 희가 유일한 대표로 회담에 나서게 되었고, 고려의 성종 임금님은 멀리까지 배웅하며 눈물의 전송을 하였다.
서희와 소손녕의 회담은 널리 알려진 대로 당당하고 자주적인 실리외교의 전형을 보여주었으며,
서로에게 이익이 되는 알찬 결과를 얻게 되어 서희를 민족의 위인으로 만들었고,
단 한 차례도 단위부대를 지휘해 본 적 없는 서희를 장군으로 불리게 했다.
서희의 업적은 강동 6주를 얻었다는 것인데....
강동6주는 현재 평안도 일대의 지역으로 당시에는 누구의 땅도 아니었고, 발해의 유민이랄 수 있는 여진족이 거주하는 땅이었다.
서 희는 거란과 친교를 맺을 수 없는 이유로 중간에 끼어있는 여진족 핑계를 대었고,
소 손녕은 땅 보다는 배후의 안전이 목적이었고,
강동 6주는 거란의 지배가 미치지 않는 남의 땅이나 마찬가지 였으므로, 선심쓰듯이 고려에 이양하였다.
발해의 유민으로서, 강동6주의 실질적 주인이었던 여진족에게는 기가 막힐 일이었겠으나, 힘의 논리가 그러하니 어찌하겠는가?
고려는 평안도 일대를 개척할 수 있는 권리를 얻었고, 거란의 철수를 이끌어 내는 결과를 얻은 반면,
거란은 송과의 한 판 대결이라는 메인게임을 남겨놓은 상태에서, 병력을 엉뚱한 곳에 소모하는 미련한 짓을 하지 않으면서도.
고려와 송과의 관계를 끊었고, 남의 땅인 강동 6주를 이용하여 고려와 여진이 서로 치고 받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사대의 예를 받기로 하여 명분까지 챙겼으니, 결과만 놓고 본다면 거란이 더 많이 챙긴 회담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이러한 회담은 정상적인 국가에서는 일상적으로 이루어지는 외교전이기도 한데,
당시의 고려에서는 국가의 명운이 걸린 일이 되어야 했을 정도로
국제적인 안목을 갖추고, 나라를 위해 자신의 희생을 감수할 수 있는 외교관의 자질을 갖춘 인물이 드물었다.
다행히 서 희가 거란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하여 당당하고 영리하게 대처한 덕분에 위기를 넘기고 강동 6주를 챙기는 소득을 얻기는 하였으나,
전체적인 일의 진행과정은 매끄럽지 못했고 이후 유사한 위기가 발생했을 때 비슷한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질 수 없었다.
서 희의 업적은 회담의 타결 뿐만 아니라 명목상 우리의 영토가 된 강동6주를 실제로 개척한 일이었다.
강동 6주는 흥화진 (의주), 용주 (용천), 통주 (선천), 철주 (철산), 귀주 (구성/귀성), 곽주 (곽산)를 말하는데
서 희의 노력으로, 원래 험한 지형인 이 일대를 확보했을 뿐만 아니라 방어시설까지 갖추게 되자
강동 6주는 난공불락의 요새지대가 되었고, 이후 이어진 국가의 위기 때마다 북방 방어에 중추적 역할을 하게 되었다.
거란의 1차 침입.
변변한 전투는 별로 없었어도,
서희라는 위대한 인물을 탄생시키며 새로운 영토를 주었고,
취약한 국가 시스템을 확인 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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