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사] 고려: 제 11 대 문종 2
본문
공음전을 지급하여 그동안 왕들의 보호자이자 아버지 역할을 해왔던 문벌 귀족들에게 은혜를 갚은 문종은
본격적인 왕권 강화에 시동을 걸었다.
그동안 한반도의 왕들이 귀족세력에 대항하기 위해 즐겨 사용한 방법은 불교세력을 이용하는 것이었는데,
문종 또한 최충을 비롯한 문신 귀족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개경 인근에 흥왕사를 창건하여 그 유구한 전통의 맥을 이었다.
절 하나 짓는다고 왕권이 강화되면 얼마나 될까 싶지만,
흥왕사는 경복궁 만한 면적에 2800여 칸의 건물을 배치하여 규모가 거의 왕궁 수준이었고,
일단 유사시에 승병으로 돌변할 수 있는 상주인원만 수천 명, 거기에 주변을 성벽으로 둘러싸기 까지 하였으니,
비록 겉 모습은 절이었으나, 막강한 친위세력이 상주하는 개경인근의 거대 요새나 다름 없었다.
문종은 이 요새에 금과 은을 시주하여 나중에 국제적으로도 유명해지는 화려한 금탑을 조성하게 하였다.
이는 평소 근검절약을 강조하며 검소한 생활을 했던 그의 국정 방침과는 배치되는 것이었고, 경건한 신앙심을 표현했다 해도 과한 양이었는데.
왕의 높은 뜻을 미천한 백성이 어찌 알랴만은, 귀족들에게 왕실의 부를 과시하기 위해 그리한 것이 아닐까?
뭐가 어찌 되었건 압도적인 부의 상징인 금탑주위를 돌고 있는, 호국사상 및 왕즉불 사상으로 무장된 수천 명의 중들을 자주 보아야했던, 수도권에 상주하고 있던 귀족들이 받는 압박감은 상당하였을 것이고,
이는 강력한 힘을 가진 왕의 출현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 요새의 첫 번째 주지는 문종의 넷째 아들 대각국사 의천이었고,
의천은 그 유명한 교선 양종의 통합을 추진하여 문종의 기대에 부응하였다.
이렇게 불교를 친위 세력화하는 한편 유학도 장려하여 일명 해동공자 최 충의 적극적인 협력 또한 끌어낼 수 있었다.
이 시기에 성립된 최충의 9 재를 비롯한 사학 12도는 나중에 국자감이라는 공교육을 무너뜨리고 족벌이 판치던 고려사회에 학벌이라는 병폐를 추가하게 되지만,
뭐든 처음에는 긍정적인 면이 많으므로 문종의 시기에는 문치의 시대를 이끄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문종은 평화기에 소외되기 쉬운 무장들에 대한 배려도 잊지 않아 상장군의 직급을 6부의 상서보다 높게 배분하여 그들의 충성도 이끌어 내었다.
가히 조화와 균형의 달인이라 할 수 있었다.
이전 정종기에는 그리도 빈번했던 자연재해도 뜸하였는지,
나라의 창고에는 해마다 곡식이 늘어나고, 백성들은 풍요로웠으며,
더불어 상업도 발달하여 개성에 이슬람 상인이 급격히 늘었다 한다.
Korea가 만방에 알려진 시기였다.
이러한 빼어난 내치는 자연스레 국방력 강화로도 이어져,
철모르고 준동하는 여진 촌놈들은 매로 다스려 대국의 위엄을 보였으며,
여전히 미련을 못버리고 압록강에서 깔작대는 거란 따위는 가볍게 무시하고
송과 단독으로 수교하여, 거란의 어쭙잖은 종주권 타령을 잠재웠다.
명실상부한 동북아의 균형자로 등극한 것이다.
선대부터 내려온 투쟁의 종지부를 찍고 고구려 장수왕기에 버금가는 외교적 위상을 누린 문종... 감개무량하였을 것이다.
내, 외치를 가리지 않는 흠 잡을 데 없는 왕의 통치라 하더라도, 모두가 만족하는 이상사회와는 거리가 멀었으므로 불만세력이 생기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으나,
문종이 이끄는 시대의 대세는 이들의 움직임을 모의에 불과한 찻잔 속의 태풍으로 만들었고,
수년이 지나 사후 보고를 받게 된 문종은 버르장머리 없는 주동자 거신만 죽여버리고 나머지는 가볍게 처리하여,
이 시대가 법치가 이루어지는 태평성대임을 만방에 과시하였다.
문종 치세의 부정적인 면으로 많이 회자되는 것이 문벌 귀족의 세력 강화, 사학의 창궐, 외척 세력의 전횡 등인데.....
문벌 귀족의 세력 강화...
우리 역대 왕조의 그 많았던 왕들 중에서, 귀족들을 누르고 철권을 휘둘렀던 왕이 몇이나 되었던가?
특히나 태생적으로 호족 연합체 성격이 짙었던 고려는 절대 왕권과 인연이 없었으므로,
단 한 번도 귀족들의 세력이 약했던 적이 없던 고려에서 왕 노릇이라는 게 광종을 제외하면,
견제와 균형을 유지하는 조정자의 역할을 벗어나기 힘들었다.
그런 의미로 본다면 문종은 모범적인 고려 왕이었고 왕권도 강한 편이었다.
사학의 창궐...
사학은 사승을 만들고 그렇게 굳어진 관계는 학파를 만들기도 하는데,
이는 학문의 발달이라는 측면에서 그다지 나쁠 것은 없으나, 정치적인 면에서는 스승과 제자로 이어지는 배타성이 강해,
국가적 위기 상황이 아닌 평화기에는, 임금의 명령보다는 제 스승의 뜻을 무겁게 여기고, 대국적 관점 보다는 자파의 이익에 매몰되는 경향이 있었다.
이러한 단점 때문에 역대 의식 있는 왕들은 모두 공교육을 강화하기 위해 힘을 기울였는데,
거의 언제나 실패하였다.
따라서 사학의 창궐은 고려를 배부르고 등 따습게 만든 문종의 실책이라기 보다는,
공자의 사설학원에서 출발한 유교의 속성에서 비롯된 면이 크다고 할 것이다.
외척세력의 전횡...
문종은 아버지처럼 세 자매를 동시에 아내로 맞아들여 경원 이씨를 강력한 외척 세력으로 만들어 주었는데,
세 자매가 모두 미인이었기 때문에 그랬을.....리는 없고, 아버지처럼 취약한 왕권을 보완하기 위해 몰아주기를 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외척세력은 역대 어느 왕조에서나 쓰기에 따라서는 약이 될 수도, 독이 될 수도 있는 양날의 칼이었는데,
경원 이씨 세도의 첫번째 주자인 이자연은 후대와 다르게,
최충과 더불어 문종의 든든한 국정 파트너이자 문치의 시대를 여는 주역으로서,
정권을 안정시키고 나라의 발전에 기여하는 긍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37년간을 재위하며 고려의 황금기를 이룩한 문종,
그의 장수는 그 당시를 살아간 백성들의 홍복이었고,
고려가 500년 가까운 역사를 이어갈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되었다.
세종대왕이 따로 없는 위대한 임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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