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사] 고려 : 윤 관의 여진 정벌 (2)
본문
1107년 여진의 동태가 심상치 않다는 첩보를 입수한 윤 관은 겨울이 시작되는 음력 10월, 대망의 고토회복을 위한 첫걸음을 내딛었는데,
정공법으로 바로 치고 들어간 것이 아니라, 여진의 추장들을 불러 모아 잔치를 베푼 후 참살하는 기만책을 사용하였다.
민족의 위인이 사용한 방법치곤 좀 치사하긴 하지만,
이는 그가 숙종 부자의 전 재산이나 마찬가지인 대군을 이끌고 있었기 때문에 그 책임감이 지대하여 그리하였을 수도 있고,
무인의 자부심 보다는 책략을 우선시 할 수밖에 없는 문사 출신이라 그랬을 수도 있을 것이다.
뭐가 되었건 윤 관이야 말 못할 사정이 있어서 그랬다 치고,
속아 넘어간 여진의 경솔함도 선뜻 이해가 되지 않기는 매한가지인데,
얘네들 속사정도 자세히야 알 수 없겠지만,
아마도 음력 10월이면 함경도지방은 완전히 겨울이라,
눈 덮인 산지에서는 보병이고 기병이고를 떠나, 군대 자체를 움직이기 힘드므로, 하던 전쟁도 멈추는 시기였고,
이전에 포로가 되었던 추장도 석방한다고 하니, 고려의 화친 제의를 지들 편한 대로 생각한 듯하다.
뭐를 어떻게 생각했든 결과적으로 대부분의 추장들이 윤 관의 초대에 응하여 저마다 나름의 단꿈에 젖어 흥겨운 술잔을 기울였는데,
이 잔치는 홍문지연이었고, 이들은 유방과 달리 번쾌가 없어 피하지 못하여, 약 400 여 명이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기만책을 성공시킨 고려군은 즉각 다섯 갈래로 나뉘어 파상적인 공격을 펼쳤는데,
수뇌부가 몰살되다시피한 여진은 조직적인 대응은 생각도 못하였으므로,
오만여의 주력군을 이끈 윤 관이 보동음성까지 쭉쭉 밀고 올라가자, 성을 의지하여 발악적인 저항을 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목숨을 도외시한 이들의 저항은 처절하였으나 결국 척 준경의 무력 앞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고,
다른 방향의 공격군 또한 순조롭게 여진 부락들을 점령해 나갔다.
이렇게 100여 촌락을 접수한 윤 관은 몽골라령 아래에 영주성을 쌓았으며, 화관령 아래엔 웅주성을, 오금림촌에 복주성을, 궁한이촌엔 길주성을 쌓았다.
이는, 우리 입장에서는 수백년만에 고토를 회복한, 후세의 사가들이 감격에 몸을 떨 만한 사건이었지만,
조상대대로 그곳에 살던 여진에게는, 고려군이 유목민 전사들과 같은 약탈군이나, 징벌을 위한 일회성의 군대가 아니라,
통치를 위한 점령군이라는 사실을 확인시켜주는 악몽과도 같은 일이었으므로,
사기를 당해 부모 죽고 사는 집까지 빼앗긴 꼴이 된 여진 전사들은 이가 갈리고 피가 거꾸로 솟구쳣을 것이다.
맞아 죽으나 굶어 죽으나의 상황이 된 여진 전사들의 투쟁은 당연히 가열차게 전개되었고....
고려군은 곳곳에서 고전하게 되었다.
총사령관인 윤 관도 가한촌에서 매복 공격을 받아 고립된 적이 있었는데,
당시 윤 관이 거느리고 있던 8000여의 군사는 거의 죽거나 흩어져서 10여명만 남은 상태였고, 동행했던 부원수 오연총마저 화살에 맞아 사경을 해매는 지경이었다 한다.
이러한 상황이라면 항복을 고려하는 것이 일반적인 선택이었을 것이나, 윤 관은 민족의 위인답게 자신의 목숨을 초개와 같이 여기고 끝까지 항전했.... 을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전쟁 초기에 자신이 한 짓도 있고, 앞으로 고려에서 살아가야 할 자손들도 생각해야 하므로,
항복은 꿈도 꾸지 못하였을 것이다.
문사 출신이었으니 유언장의 문구 따위를 고민하고 있지나 않았을까?
아무튼 절체절명의 상황임에는 틀림이 없었는데....
다행히 멀지 않은 곳이 있던 척 준경이 의리의 사나이답게 소수의 결사대를 이끌고 생사를 도외시한 구원의 손길을 뻗어 왔다.
이 희대의 무인은 구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시간을 끌어, 여진군이 스스로 물러나게 만들었다 하는데,
참으로 믿기 힘든 무용이나 어쨌든 이 덕분에 윤 관은 구사일생활 수 있었다 한다.
이 사건으로 척 준경은 합문지후에 봉해지고 윤 관과 부자의 연을 맺었으며 이후에도 많은 공을 세웠는데,
그의 능력은 석년의 유 금필에 필적하는 것이었다.
그가 없었더라면 아마도 윤 관의 여진 정벌은 중도에서 좌절되었을 것이다.
이런 저런 우여곡절을 겪으며 윤관은 여진의 이를 악문 저항에도 불구하고
침입 이후 석 달 만에 6성을 완공할 수 있었고, 3월에는 3개성을 더 추가하여 그 유명한 동북 9성을 완성하였다.
9성의 각각의 이름은 함주, 영주, 길주, 복주, 우주, 공험진, 의주, 통태, 평주 등인데,
각각의 정확한 현재 위치는 논란이 많으나, 뭐가 되었건 함경도 지방의 유일한 곡창, 함흥평야 일대는 확실히 포함하고 있었던 듯하다.
두만강 위쪽으로 700리라는 설도 있으나 인적도 드문 황무지에 성까지 쌓았을 것 같지는 않고... 말뚝을 박았을 수는 있다.
아무튼 우리 역사상 드물게 이민족을 정벌하여 영토를 확장한 경사 중의 경사였으므로,
임금은 윤 관을 불러 포상하고 잔치를 열어 치하를 아끼지 않았다 한다.
예종, 그 젊은 나이에...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나 이는 발해멸망 이후 동북지방에서 근근히 살아가던 여진족에게는 마지막 밥줄이 끊겼다는 의미이기도 했으므로,
다른 건 다 참아도 배고픈 건 못 참는, 인간을 포함한 모든 동물들의 특성 상, 여진족도 강력한 생존권 투쟁을 전개하였다.
고려군 또한 수백년만에 되찾은 고토를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였겠지만,
아무래도 절박함에서 차이가 있었을 것이고, 그나마 의지가 되는 성 또한 위치가 별로여서 수비군이 고립되기 일쑤였다고 한다.
결국 구원하기도 지키기도 곤란한 나날이 이어지게 되었고, 그 소모되는 물자와 인명을 감당하기 힘든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2차 침입 때의 거란 꼴이 난 고려는 예정했던 식민 사업은 손도 댈 수 없는 상황이었고,
여진의 또 다른 종주권자이자 아직까지는 동북아 최강자인 거란의 동향도 신경이 쓰이는데다가,
함경도의 지세가 보통 험한 것이 아니어서 물자와 인력을 보내는 일 자체가 만만치 않을 뿐만 아니라 기간도 한정이 없으니 걱정이 쌓여갈 수밖에 없었는데,
여진족은 공격만 한 것이 아니라, 군을 물리기만 하면 이후로는 고려를 침입하지 않는 것은 물론 대대손손 부모의 나라로 섬기겠다고 애원하는 등의 능란한 외교술을 사용하여, 가뜩이나 정신 사나운 고려에 갈등의 불을 질러 버렸다.
자고로 생기는 것도 없이 사람만 죽어 나가는 전쟁 좋아하는 백성 없고, 자기 재산 축나는 것을 즐기는 귀족은 없는 법이니,
철군의 여론이 힘을 받게 되어 젊은 왕을 점점 궁지로 몰고 있었는데, 7월 오연총이 영주성에서 대패했다는, 울고 싶은데 뺨 때리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 결정적인 한 방에 예종은 무너졌고...
철군을 명하였다.
9개월여 동안 총력을 기울였음에도 불구하고 빈 손만 남은 격이니,
얼마나 분통이 터졌을까?
후손인 우리의 입장에서도 일장춘몽의 허무감을 지울 수 없으나 상대였던 여진은 상황이 달랐다.
분열의 대명사였던 여진이 아골타의 완안부를 중심으로 통일을 이루었을 뿐만 아니라
거란을 대치하는 동북아의 패자로까지 급성장하는 기염을 토한 것이다.
이러한 믿기 힘든 성장의 배경으로, 고려가 헌납한 꼴이 된 동북 9성이 거론되고는 있으나,
국가의 성장과 발전에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사람이고 , 뭉쳐진 힘이므로 다른 요인들이 더 중요한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
전쟁 초기, 사기를 당하여 수뇌부가 몰살한 것이 그들의 고질적인 분열을 치유하는데 도움이 되진 않았을까?
뭐가 되었건 그들이 이룬 성과와 그들에게 받은 모욕을 생각하면,
당시의 철군 결정이 아쉽기도 하고, 정주 민족의 한계를 느끼게도 하지만,
공연히 미적대다가 진창에 빠져 국력을 있는대로 다 소모하고 되치기를 당했을 수도 있었으므로,
일찌감치 포기하여 명목상이나마 명분을 챙기고, 남은 전력을 보존하여, 여전한 동북아의 강국으로 대접받을 수 있게 된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는 생각도 든다.
의미 없는 인명의 소모도 막았고.... 왕권도 지켰고.....
좋다 만 전쟁이었으나,
이 정벌 덕분에 금은 거란과 달리 대제국이 된 이후에도 고려에 대한 대규모 침입를 생각하지 못하였다.
...음...아닐 수도 있지만...
이렇게라도 위안을 삼아야지 어찌 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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