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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 고려 : 제 17 대 인종 : 이 자겸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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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 해.

그는 이 자겸의 둘째딸 순덕왕후의 장남으로서,

1122년 아버지 예종이 고려왕들의 평균 사망 나이인 45세에 서거하였을 때,

14살에 불과한 어린 아이였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어린 군주는  정정불안의 원인이 되는 경우가 많았고,

절대왕권과 인연이 없던 고려는 그 위험도가 더 높았으므로,

태조는 훈요십조를 남겨 이를 경계한 바 있었고, 그의 자손들도 그 취지를 잘 이해하고 있었는지,

고려 왕실에서 형제상속은 드문 일이 아니었는데,

예종은 그냥 어린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죽어버렸다.

이는 그동안 형의 눈치만 보았으나 그래도 설마하던 동생들에게는 만행에 가까운 처사였으므로,

여기 저기서 불만이 터져나오고 정정이 불안해지는 것은 거의 필연에 가까운 일이었을 것이다.

특유의 카리스마로 나라를 이끌며 고려 황금기의 마지막을 화려하게 꽃 피웠던 나름의 명군 예종이 이러한 사태를 예측.... 못했을 수도 있지만,

그는 왕권을 강화하기 위하여 인주 이씨를 외척세력으로 복원시켜놓은 바 있었는데​

인주 이씨의 좌장 이 자겸은 인종이 어리다는 이유로 즉위에 어려움을 겪자, 

외척 본연의 역할을 수행한다는 사명감 보다는 이익이 우선이었겠으나,

독단으로 외손자를 즉위시킨 후 권력 투쟁을 전개하여 여타의 불만 세력들 제거하였다.

​이로써 예종의 마지막 의도는 관철된 셈이었고,

자신은 정권을 장악할 수 있었으므로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이었으나,

​영원한 고려의 대주주인 문벌 귀족들의 입장에서는 눈꼴시고 아니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 자겸은 정란 공신급의 외척으로서 막강한 권력을 구축하였으나, ​이는 일종의 공백기 권력으로서,

자신의 힘의 원천인 둘째딸이 이미 사망한 상태였으므로, 어린 왕이 어떻게 성장하고 누구에게 장가를 가느냐에 따라 ,

부침을 겪을 수밖에 없는 한계를 지닌 권력이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한 줌의 권력이라도 놓지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이 권력자들의 속성이고,

​특히 이 자겸처럼 이미 한 번 몰락을 경험했던 자들은 그러한 경향이 심하였는데,

​이 자겸은 골똘히 생각했는지까지는 모르겠으나, 아무래도 외척질이 가장 적성에 맞는다고 생각했는지,

자신의 남아 있는 셋째 딸과 넷째 딸을 왕비로 만들고자 하였다.

현대에서도 인기있는 소위  정략결혼을 추진한 것으로 그 자체만으로는 새로울 것 없는 상투적인 권력 강화 수법이었겠으나,

이 경우는 인종의 모후가 이 자겸의 둘째딸이었으므로, 친 이모들이 조카와 결혼하는 것이 되어,

촌수 계산으로도 머리가 상당히 복잡해지는 일이었다.

따라서 이 자겸으로서는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적들의 의표를 찌르는 회심의 한 수라고 스스로를 대견하게 생각했을런지는 모르겠으나,

이는 개 족보에 가까운 당시 왕실 결혼 관습으로도 해괴한 일에 속하였으므로,

이 자겸을 제외한 일반적 소양을 지닌 사람들에게는 희대의 괴사가 되었을 것이다.

뭐가 되었건 ​이 자겸은 자신이 가진 실력을 총동원하여,

문벌귀족들의 공격과 결혼 당사자들의 민망함을 누르고 이를 관철시키고야 말았는데,

조정의 권신들에게야 그냥 정치싸움이었겠지만, 막상 결혼을 해야 했던 당사자들은 얼마나 기가 막혔을까?

어찌 되었건 이로써 이 자겸의 권력은 하늘을 나는 새도 떨어뜨릴 정도가 되었고,

더불어 인주 이씨의 세도 정치도 본격적인 막을 올리게 되어,

이 자겸의 일곱 아들들은 정계와 종교계를 막론하는 국가의 요직을 차지하며 국정을 농단하였고,

그와 조그마한 연줄이라도 있는 자들도 모두 한 자리씩 차지하여 떵떵거리게 되었으며,

매관매직과 부정부패가 일상이 되었음은 물론 왕실의 권위가 공공연히 무시되는,

세도정치의 전형적인 부작용이 나타게 되었다.

 

이 꼴을 본 18세 질풍노도의 소년왕은 크게 분노하였고,

이 자겸에게 소외된 다른 귀족들과 연합하여,

성급하게도 친위 쿠데타를 꿈꾸었으나,

여진 정벌의 히어로 척준경까지 포섭하고 있던 노회한 외할아버지이자 장인의 상대가 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친왕파는 선제 공격에도 불구하고 척 준경의 무력에 무너져버렸고,

궁궐은 불타올랐다.

잘 곳마저 없어진 왕은 사춘기 소년답게 금방 의기소침해졌는지,

제 발로 외갓집으로 걸어가 맥없이 백기 투항하였다.

이 자겸의 완승이었다.

 

인종의 양위제안을 받은 이 자겸은 18자 위왕설을 퍼뜨리는 등 왕이 될 꿈에 부풀게 되었고,

인종을 독살하려 하였는데,

이제는 서방님이 된 조카의 고난이 안쓰러운 이모들이 이를 적극적으로 방해하여 아버지를 좌절시켰다 한다.

그런데...전쟁의 당사자인 적국의 왕도 죽이지 않고 통치에 이용하는 것이 정치의 상례인데,

이미 양위 의사를 밝힌, 가치 높은 볼모나 마찬가지인 왕을 죽여 무슨 이득이 있다고,

정치판에서 잔뼈가 굵은 이 자겸이 그런 짓을 하려 하였을까?

선뜻 이해가 가지 않지만... 아무튼 그렇다 한다.

어찌 되었건 이 자겸의 왕 되기 작전은 곳곳에서 암초를 만나 삐걱거렸던 모양인데,

설상가상으로 무력 담당 척 준경과 사이가 벌어지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하인 놈들끼리 싸우는 도중, 이 자겸의 하인들이 주둥아리를 잘못 놀려 척 준경을 분노케 한 것이 그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하는데,

뭔 애들 싸움이 어른 싸움 된 것도 아니고....

왕좌를 노리는 사람이 그만한 일로 거사를 일으키기도 전에, 자신의 가장 중요한 전력을 잃어 버렸을까?

자세한 속사정이야 모르겠으나 어찌 되었건 시련을 겪어 한층 성숙해진 소년은 적 분열이라는 호기를 놓치지 않고,

척 준경을 포섭하는 만만찮은 정치력을 발휘하였다 한다.

말을 바꾸어 탄 척 준경은 쿠데타를 준비하고 있던 이 자겸을 선제 공격하여, 전의를 상실한 적들을 제압하고,

이 자겸을 잡아 왕 앞에 무릎을 꿀리는 명성에 걸맞는 위용을 보여주었다.

여포를 빼앗긴 동탁 꼴이 난 이 자겸은 자신의 반역 의지를 극구 부인하고, 드높은 충성심을 일관되게 주장하였다 하는데,

그 말이 먹혔는지 아니면 인종이 시호대로 어질어서 그랬는지는 모르나,

예상과 달리 극형을 면하고 유배를 가게 되었다.

이 자겸은 귀양살이 중 그 지방의 말린 조기를 인종에게 진상하면서,

비굴하지 않겠다는 뜻의 굴비를 적어 올려 영광굴비의 어원을 만들었다는 설이 있으나... 뻥이라 한다.

부녀의 천륜보다는 조카와의 부부의 정을 따랐던 이모 둘은 비록 폐비가 되기는 하였으나,

저택과 노비 등 위자료를 넉넉히 받는 호사를 누렸다 하는데,

이 부녀들을 배출했던 인주 이씨 가문은 별로 운이 좋지 못하여, 그야말로 철저히 몰락하였으며,

이후 역사에서도 근근히 명맥을 유지하는 수준에 머물렀다.

이 자겸..음... 그가 과연 왕조교체를 꿈꾸었을까?

한편 이 자겸 타도의 최고 수훈갑 척 준경은 공신각에 초상이 올라가는 광영과 함께 세도가로 떠올랐으나,

그 기간은 짧았고, 서경파 정 지상의 탄핵을 받아 고향으로 유배되었다.

​척 준경.

경이적인 무예를 지니고 국가를 위해 많은 공을 세웠으나,

무신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남의 칼의 되어 이리저리 휘둘리다가 끝내 버려지고만 비운의 무장이었다.

그를 보며 그의 후배들은 무슨 생각을 하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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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5-11 07:3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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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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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온 님도 설민석 씨처럼 동강 만들어보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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