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사] 고려 : 제 19 대 명종 : 변란의 시대 (4) : 경 대승 (1)
본문
경 대승은 청주의 유서 깊은 향리 집안 출신으로,
아버지 경 진은 무신 정변에 적극 참여하여 평장사까지 지낸 인물이었다.
그는 일자무식의 다른 무신들과 다르게 천문에 취미가 있을 정도로 상당히 유식하였으며, 무예와 용력이 뛰어났다 한다.
뛰어난 자질과 아버지의 후광에 힘입어 어린 나이부터 출세가도를 달리게 된 그는,
불과 21세에 친위군 대장인 견룡 행수에 임명되었고, 여러 번의 승진을 거쳐 정4품 장군이 되었으며,
본향 청주에서 소요사태가 일어나자 이를 진정시키기 위한 사심관까지 되었다.
사심관이 된 그는 대대로 물려오는 재산까지 국가에 헌납하는 등 상당한 의욕을 보였으나,
그의 일처리가 당대 집권세력의 마음에 안 들었는지 얼마 안 되어 면직되고 말았는데,
뛰어난 능력의 자존심 강한 젊은이들이 대부분 그러하듯이, 파면된 25세의 경대승은 절치부심하...였는 지는 모르겠으나,
현 정권에 대해 강한 비판의식을 가지게 되었고,
당시 정권을 담당했던 송 유인과 정 균이 여러 가지 실정을 거듭하며 조야의 인심을 잃자,
세상을 뒤집어 버릴 결심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것이 그와 고려의 운명을 바꾸어 놓았다.
그가 발칙한 정 균을 제거하기 위해 정의의 칼을 뽑자, 옛 부하들과 금군의 병사들은 기꺼이 수족이 되어 주었고,
팔불출이자 딸 바보인 명종은 소중한 공주가 정 균의 첩이 될 뻔한 위기에서 구해준 그의 쾌거에 무한 감사와 함께 신뢰를 보여 주었다.
그는 정 균을 제거한 후 송 유인 등 정적이 되었거나 될 만한 자들을 모조리 도륙하였고,
그냥 두었어도 곧 죽을 나이인 정 중부를 기어이 찾아내어 저잣거리에 효수하였는데,
마치 보현원 사건을 연상케 하는 이 사태에
조정의 권신들은 예전의 문신들처럼 반격할 생각은 못하고 전전긍긍하기만 하였으므로,
자칫 피 끓는 젊은이의 단순 테러로 끝날 수도 있었던 그의 의거는 본격적인 쿠데타가 되었다.
쿠데타를 성공시킨 26세의 젊은이는 현 질서 대한 반감을 숨기지 않았고 의종 살해에 대해 적개심을 표출하였는데,
이는 주변 어른들의 기대에 크게 어긋나는 짓으로서,
정 중부 덕에 살맛나는 세상을 맞이했던 무신들은 분노하였고,
무신 정변의 최대 수혜자라고 할 수 있는 명종 또한 거부감을 가지게 되었다.
이에 그는 명종의 입각제의를 거절했을 뿐만 아니라, 모든 지위를 포기하고
동지이자 수족인 무술고수 100여명과 함께 자택으로 물러나 버렸다.
조정이나 군부에 막후 조종할 수 있는 세력을 가진 것도 아니고, 임금도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은 상황에서
매우 위험한 선택을 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는 지금까지 시도 된 적이 없는 독창적인 방법으로 권력을 유지하며 고려 사회를 개혁해 나가기 시작했다.
경 대승은 도방이라 불리는 자신의 수족들을 비밀경찰처럼 운용하여,
반발세력들과 누가 보아도 죽어 마땅한 놈들을 때려잡았고, 조정에 수시로 출몰하여 집정의 권한을 행사하였는데,
심약한 명종은 아무런 제동을 걸지 못하였고,
제 발 저린 데가 많은 권신들은 공연히 나서다 박살나는 수가 있으므로 조용할 수밖에 없었으며,
이전 정권에 비해 상대적으로 우대를 받게 된 문신들은 오히려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으므로,
그의 권력은 점점 강해졌고 도방은 초법적인 기관처럼 되어 사회 전반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도방은 공식적인 국가 기관이 아니었으므로 그 구성원들은 국가로부터 월급을 한 푼도 받지 못하였는데,
일반적인 수장들과 달리, 경 대승은 누대의 집안 재산도 부정하게 모은 재산이라 하여 국가에 헌납할 정도로 축재에 무관심하였으므로,
가끔 명종이 상당한 하사품을 내려주었어도 그의 식솔들을 포함한 수족들은 경제적으로 궁핍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침실까지 숙소로 제공하고, 한 이불을 덮고 자기를 마다하지 않는 수장에게 손을 벌릴 수 없었던 도방의 인원들은,
그 동안의 비밀경찰 활동을 통해 반란의 위험이 있거나, 부정 축재한 인물들에 대한 정보는 충분히 가지고 있었으므로,
경대승의 묵인, 방조 하에 사회정화를 겸한 약탈로 자금을 조달하기 시작하였다.
덕분에 그 동안 떵떵거리던 고려의 고위층들은 더욱 몸을 사리게 되었으나 일반 백성들은 환호하였다.
이리되자 고려의 정국은 도방을 중심으로 돌아가게 되었고
조정은 추인기관 비슷하게 되었으며 그동안 권력의 중심에 있던 중방은 무력하게 되었다.
중방은 현종 때부터 있었던 무신 협의체 기구로서 고위 무관들이 모여 한담이나 나누던 일종의 친목회...가 아니라,
비록 그 위상은 낮았으나, 그래도 무신들의 최고 의결기구로서 요즘으로 치면 합동참모본부와 비슷한 기관이었고,
정변 이후에는 계엄 사령부와 같은 역할을 하던 권력의 중추였다.
따라서 이 의방이나 정 중부 같은 당대의 집권자들은 중방을 장악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고, 그 권위를 이용하여 정권을 유지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중방의 고위 무관들은 일정한 권력을 확보할 수 있었고 그를 바탕으로 집권자를 견제하는 기능을 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중방은 당대 무인들에게는 자부심과도 같은 기관이었고,정 중부 또한 무신들의 세상을 만들어준 은인 같은 사람이었으므로
정 중부의 처단에 이은 중방의 무력화는 무신들에게 상실감과 분노를 동시에 안겨주는 폭거였을 것이고,
중방의 권력에 의지하여 왕 자리를 유지하던 명종에게는 든든한 울타리가 무너졌다는 의미였을 것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경 대승은 자신의 복고주의적이며 근본주의적인 철학과 현실적인 필요성에 따라
죽일 놈들은 죽이고 박살낼 놈들은 박살냈기 때문에,
천하의 이의민도 고향인 경주로 도망칠 수밖에 없었고, 명종은 극도의 두려움에 떨게 되었다.
아마도 경 대승의 이름만 들어도 경기를 일으켰을 것이다.
이렇게 신비와 공포를 적당히 혼합한 생소한 체제로 고려를 지배하던 경 대승은
그 위세가 무색하게 30살을 갓 넘기고 병사하고 말았는데,
그 집권기간이 고작 4년이었고 후계자를 키울만한 나이도 상황도 아니었으므로
그의 새로운 체제의 핵심인 도방은 그의 원수들에 의해 요절이나, 구성원들이 거의 참살되는 비극으로 끝을 맺었다.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 막나가던 무신정권에 물음표를 던지며, 투철한 신념으로 사회 정의를 위해 매진했던 경대승,
역사상 드문, 현실과 타협하지 않은 이상주의자였으나, 아직 경륜이 부족할 수밖에 없는 젊은 나이에 요절하여 아쉬움을 남겼다.
그가 남긴 재산은 도방의 숙소로 사용하던 집 한 채와 쌀 몇 섬 그리고 약간의 말먹이 정도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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