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사] 고려 : 제 23 대 고종 : 최 충헌
본문
왕 철
존재감이 희미한 강종의 아들로,
징기스칸의 침략으로 금나라가 만주에 대한 지배력을 잃기 시작한 1213년, 22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만주가 몸살을 앓든 말든, 고토에 대한 야망을 가지지도, 가질 수도 없었던 최 충헌은
그저 집안 단속이나 하며 신생 막부체제의 공고화에 주력하였는데,
돈을 펑펑쓰며 실질적인 왕 노릇을 하던 이 시기가 아마도 그의 평생에서 가장 평온하고 영광스러운 황금기였을 것이나,
아쉽게도 그 기간은 짧았다.
1216년 거란족이 압록강 변에 나타나면서 고려도 동북아의 풍운에 휩쓸려 들어가게 된 것이다.
현종에게 안습의 몽진을 강요하기도 했던 거란족은 금에게 멸망한 후 일부는 멀리 이란까지 달아나 나라를 세우기도 하였지만,
만주에 남아 금의 지배를 받던 부족들도 많았는데,
이들은 징기스칸이 나타나 철천지 원수인 금나라를 마구 두들겨 패자, 자발적으로 몽골에 협조하였다.
그러나 세상 일이 다 그렇듯이, 용 꼬리 보다는 뱀 대가리를 선호하는자들도 있기 마련이어서,
이런 자들은 야사불을 중심으로 일종의 힘의 공백 지역인 고구려의 비사성이 있던 징주에 대요수국을 세웠는데,
처음에는 제법 흥기하여 포선만노의 정벌군을 물리치기도 하였으나,
일 년도 못되어 몽골의 토벌군에게 패하였고 근거지에서 쫓겨나 압록강 변까지 몰리는 신세가 되었다.
돌아가 목이 잘리기 보다는 자립을 선택한 포선만노가 간도 지역에 설립한 동진국에게 퇴로가 막힌 이 거란의 잔당들은
고려가 만만해 보였는지 압록강을 건넜는데,
가족 포함 9만이었다고 하니 전력이 그리 대단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들은 고려를 점령하여 요나라를 이어가겠다는 야무진 꿈을 꾸고 있었던 모양인데,
강동 6주를 믿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국가의 운명 보다는 자신의 안녕에 훨씬 관심이 많았던 최 충헌은... 방치하였다.
그러나 50년 가까운 중앙의 혼란은 변경의 방비에도 영향을 줄 수밖에 없었으므로,
철벽의 요새지대는 옛 명성에 무색하게도 거지 떼들의 공격에 무력하였다.
의주를 지나 평양을 유린하고 개경 인근 까지 육박하는 거란군을 본 최 충헌은
가병들로 자신과 아들 최우를 호위하게 하였으며, 거란의 잔당들을 퇴치하기 위해 승병을 비롯한 군사들를 모집하였는데,
능력이 출중한 자들은 가병으로, 나머지는 정규군에 소속되게 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자신의 문객들 중 국가에 봉사하고자 하는 자가 있으면 귀양을 보내었고.. 음...
당대 고려 최강의 전력인 최가의 가병들은 유세떠는 데나 쓰고, 애꿎은 중들이나 끌고 가는 작태에
열 받은 흥왕사를 비롯한 사원 세력들은 이에 저항하였으나 막강 최 충헌의 가병들에게 박살나 도륙 되었고,
거란의 거지들은 자신들의 전력으로 개경 공략은 어렵다고 판단했는지, 철원과 원주 방면으로 방향을 틀어 살육과 약탈을 지속하였다.
이리 되자 인심은 급격히 악화되었고 조야의 불만이 하늘을 찌르게 되었으나,
그동안 물불 안 가리고 구축했던 세력 덕분에 정권이 흔들리는 일은 없었고,
침입한 거란족도 김 취려라는 걸출한 명장이 해결해 주어 최 충헌의 마음을 가볍게 해주었다.
수염이 멋있었다는 김 취려 장군은 언양 사람으로,
능력도 부족하고 빽도 없어 최 충헌의 도방에 들지 못한 무지렁이들을 이끌고
장남이 전사하는 악조건 속에서도 분전하여, 영주, 박달재 등지에서 크게 승리하였으며,
동북면 쪽으로 쫓겨간 적도들이 군사를 보강하여 이듬해에 재침하자,
이들을 강동성 고립시켰고 몽골군과 힘을 합쳐 함락시킨 후 그 유민 5만여 명을 포로로 잡았다
몽골군 사령관과 의형제를 맺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거나 말거나 다시 안정을 되찾은 최 충헌은 말 안 듣는 놈들은 귀양 보내며 열심히 막부를 운영하다가,
1219년 71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그는 말년에, 고종에게 받았던 왕씨와 궤장을 반납하고 죄수들을 사면하는 등의 약간의 선행을 베풀었고,
자신의 죽음이 임박하자 하루 종일 풍악을 올리게 하였고 그 음악 속에 숨을 거두었다고 하는데,
그 스스로는 만족스러운 죽음이었을지 모르나 사관의 평가는 엄격하여,
“최 충헌은 미천한 데서 몸을 일으켜, 나라의 정사를 오로지 하였다.
재물을 탐하고 여색을 좋아하며 벼슬을 팔고 옥사를 흥정하였으며,
심지어 두 왕을 내쫓고 조신을 많이 죽이기까지 하였다.
크나 큰 악이 하늘에까지 뻗쳤는 데도 목숨을 잘 보존하여 방안에서 죽었으니,
천도를 알 수 없음이 이와 같은가”
라고 하였다.
-
[마루밑다락방의 서고] 초승에 뜨는 달은 ‘초승달’이 옳다. 물론 이 단어는 ‘초생(初生)’과 ‘달’이 합성한 경우이나, 어원에서 멀어져 굳어진 경우 관용에 따라 쓴다는 원칙에 따라, ‘초승달’이 올바른 표현이다. 마치 ‘폐렴(肺炎), 가난(艱難)’ 등과도 같은 경우이다.2015-05-25
-
[인문학] 아일랜드... 예이츠의 고향. 가장 늦게 도달한 기독교(카톨릭)에 가장 심취하였고 중세 수도원 운동이 크게 부흥하여 역으로 대륙에까지 영향을 미쳤던 곳... 중국보다 성리학에 더 미쳤던 한국..자본주의의 실험재료가 되어, 자국의 식량이 부족하여 백성은 굶어죽는데도 영국으로 식량을 수출해야 했던 나라. 맬더스 인구론의 근거가 됐었고.. 영국의 식민지였으며 분단의 아픔을 격고 있는 나라.. 참 한국과 비슷한 점이 많은 나라입니다.2015-04-16
-
[인문학] 러셀... 현대의 소크라테스...2015-04-15
-
[인문학] 비극적이고 치명적인 대가를 치른 후였다.-------------전이겠지요.2015-04-09
-
[인문학] 신영복 교수... 진정 겸손한 글을 쓰는 분이지요.소외 당한 자, 시대의 약자들에 대한 이해가 깊은 분이고. 그들을 대변 또는 위로할 수 있는 몇 안되는 작가들 중의 하나이지요.2015-04-08
-
[인문학] 좋군요....2015-04-07
-
[인문학] 과학이 본연의 임무대로 오류들을 이리저리 쳐내가다 보니 알맹이가 하나도 안 남은 형국이되었습니다. 그러니 과학 때문에 목적을 상실했다는 말이 나왔고, 도구에 불과한 과학이 미움을 받는 묘한 지경이 되었습니다만... 그게 과학의 잘못은 아니지요. 만들어진 요리가 맛이 없는게 잘드는 칼의 잘못입니까? 재료가 형편없었던 까닭이지요.2015-04-05
-
[인문학] 물론 ‘목적 없는 세계’라는 아이디어가 ‘신앙의 부재’와 반드시 일치할 필요는 없겠지만, 어떤 목적으로 움직이는지 회의를 주는 세계는 신앙심을 약화시키는 무신론을 철저히 방조하고 있음엔 틀림없는 것 같다. -------------음... 아직 옛날 습관이 남아있는 어투이군요...전지전능의 무한자는 인간이 알 수 있는 대상이 아닙니다. 즉 불가지의 존재이지요. 이 불가지의 존재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있는지도 당연히 불가지입니다. 과학은 이 불가지의 세계를 다루지 않습니다. 그랫다가는 오컴에게 면도날로 난도질 당합니다. ㅋㅋㅋ2015-04-05
댓글목록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