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사] 백제의 마지막 : 의자왕
본문
의자왕
백제의 마지막 왕으로, 충신들을 탄압하고, 삼천 궁녀로 상징되는 말년의 향락과 퇴폐로 나라를 말아먹은 못난 왕의 이미지이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잘난 아버지보다 더 잘났던, 그리고 백제의 마지막을 초라하지 않게, 오히려 화려하게 장식했던, 뛰어난 군주였다.
무왕의 장자로 태어나 부왕의 뒤를 이어 백제의 마지막 전성기를 이끌었는데,
모계가 불확실 한 것으로 보아 무왕이 왕이 되기 전에 태어난 듯하다.
무왕의 정비는 사택지적비로 유명한, 당시 백제 최대의 귀족 사택씨인데,
의자왕은 이 사택씨에게 견제를 받은 것으로 보이며 그로인해 태자 책봉도 나이가 40이 다 되어서야 받을 수 있었다.
젊은 시절 의자왕은 용맹스럽고 담이 크며 결단력이 있었고,
어버이를 효로써 섬기고 형제와 우애롭게 지내어 해동증자라고 불릴 정도였다고 하는데,
하필 증자인 것으로 보아 아버지처럼 유학을 좋아했나 보다.
기세등등한 계모와 귀족들에게 책잡히지 않기 위해 공부 열심히 하고 예의 지키고 그랬을 것이다.
641년 의자왕은 살얼음판 같았을 9년간의 태자 시절을 무사히 마치고, 무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당태종에게 백제왕의 책봉을 받아 정통성을 확보한 후, 별명에 걸맞게 유교 이념을 정치에 적용시켜 민심을 다독였다.
힘이 부족했을 것이므로 귀족세력과는 타협의 정치를 하였을 것이다.
즉위 이듬해, 의자왕은 대대적인 친정에 나서, 낙동강 서편에 위치한 미후성 등의 40여 성을 획득하는 큰 전과를 올렸다.
이로써 백제는 신라가 병탄했던 옛 가야지역 대부분을 점령하는데 성공하여, 가야의 고토에 대한 영향력 회복의 숙원을 이루었다.
이것만 해도 엄청난 업적인데 의자왕은 그해 가을 윤충을 시켜 대야성을 쳐서 함락시켰다.
윤충은 1만의 군사를 이끌고 공격하였고 김춘추의 사위, 딸, 외손주들까지 모조리 목을 베어 버렸다 하는데...
성종의 앙갚음을 반 정도 했다고 볼 수 있다.
성주가 당시 신라의 실권자였던 김춘추의 사위인 김품석이었다는 사실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대야성은 옛 가야지역을 통치하는 거점이자, 내륙지방으로 통하는 요충지로서 신라의 목줄이나 마찬가지였으므로
대야성의 상실은 신라의 위기를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재위 초의 의자왕은 내부적으로는 온화한 정치로 민심을 얻었고,
외부적으로는 숙적이었던 신라를 정벌, 막대한 전승을 거두며 영토를 확장하여,
정치적 위상을 드높임으로써 왕권을 강화하였다.
이듬해인 643년 정월에 의자왕은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는 한편, 11월에는 고구려와 화친을 맺었다.
고구려와 화친을 맺은 의자왕은 당항성을 공격하여 신라가 당나라에 입조하는 길을 끊어버리고자 하였다.
당항성 공격은 당의 개입으로 실패했으나 이후에도 거의 매년 신라를 공격하여 신라를 절체절명의 상황으로 몰아 넣었다.
이 시기의 백제는 한반도에서 실질적 최강국이라고 할 수 있었다.
신라는 당에 더욱 매달릴 수밖에 없었고, 당은 고구려 배후의 우방 신라를 위해 백제를 압박하였으나,
의자왕은 고구려와 관계 개선 및 잇따른 당의 고구려에 대한 군사적 실패를 보고 당을 버리게 되었다.
결과적으로는 패착이었으나 그 당시 상황에서는 나름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당과 외교를 단절한 의자왕은 고구려 백제 왜를 잇는 종적 네트워크를 형성하였고
어제의 적 고구려, 말갈과 연합군을 결성하여 신라의 목을 조였다.
신라는 김유신의 분전에 의지하여, 겨우 연명하며 당에 매달렸고..
당은 고구려와 전쟁에 백제가 걸림돌이 된다는 인식을 갖게 되었다.
국력 신장과 군사적 승리로 자신감을 갖게된 의자왕은
계모인 사택비의 사망 이후 친위 쿠데타를 일으켜 사택씨등 정적들을 제거하였고 계백, 흑치상지등 친위세력을 대거 승진 시켰다.
이때 자신의 서자 41명을 모두 좌평으로 임명했다고 하는데....
모조리 자식은 아니었을 것이고 자식 뻘의 왕족들이었을 것이다.
뭐가 되었건 근초고왕의 재림을 보는 듯하다.
의자왕은 대규모 숙청을 감행한 후에 긴장이 풀렸는지, 후세의 악평의 원인이 된 사치와 향락에 빠지게 된다.
대부인 은고의 전횡이 나타나고, 태자가 교체되고, 성충, 흥수를 옥에 가두는 등 혼란이 발생하였다.
그리고 이틈을 노린 당, 신라 연합군의 공격으로 나라를 상실하고 말았다.
그러나 당시 백제의 국력은 그 정도의 사치나 혼란을 감당 못할 정도로 약하지 않았고
혼란도 왕권을 강화하는 과정 중에 발생한 면이 많으므로 그렇게 부정적인 것은 아니었다.
다만 당이 직접 공격해 오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않았던 것이 직접적인 패인이었고
백제의 고질인 중앙과 지방세력과의 갈등으로 인해, 국난의 시기에도 서로 힘을 합치지 못한 것이
일순간에 무너지는 이유가 되었다.
백제부흥운동에서 나타나는 그 저력을 당과의 싸움에 결집시킬 수 있었다면
계백의 5000 결사대와 같은 절망적인 상황으로 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백제는 660년 소정방이 이끄는 13만 당군과 김유신이 이끄는 5만 신라군의 연합 공격에 무너졌다.
당의 직접 공격이 없었다면 무너질 백제가 아니었으나 어쨌든 결과는 결과...
백제가 개국한지 678년. 당군의 기벌포 상륙으로부터 고작 10일만이었다.
의자왕은 당으로 끌려가 얼마 후 병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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