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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 충혜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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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가 원에 신속한 이후 고려왕들은 원의 정치적 선택에 의해 폐위와 복위를 반복했다.
하지만 악정을 이유로 두번이나 폐위된 자는 충혜왕 보타시리가 유일하다.
충숙왕의 아들로 어머니는 홍규(洪奎)의 딸 명덕태후(明德太后)이며 비는 원나라 관서왕(關西王) 초팔(焦八)의 딸 덕녕공주(德寧公主)이다.
1328년(충숙왕 15) 세자로 원나라에 볼모로 가 있다가 아버지 충숙왕이 양위를 원하여, 원(元)나라 문종(文宗)에 의해  왕으로 책봉되어 1330년에 귀국하여 즉위했다.
본성이 호협(豪俠)방탕하여 주색과 사냥을 일삼고 정사를 돌보지 않았다
그의 낭비를 재정이 감당하기 힘들게 되자 국고에 비축된 포를 직접 점포를 개설하여 백성들에게 팔았으며 그걸로도 부족하여 백성들의 재산과 노비를 빼았았다.
폭정에 대한 탄원이 빗발쳐 원나라에 국새(國璽)를 빼앗기고 부왕 충숙왕에게 양위하였으나 원나라에 가서도 황음광포(荒淫狂暴)한 짓을 계속하였다.
오히려 황실의 종친임을 내세워 더한 행패를 부려 악명이 고려에서의 악명에 버금갔다.
1339년 충숙왕이 죽자 복위하였으나 원에서 그의 폭정을 우려하여 국쇄를 내리지 않았는데
국쇄를 받고자 왕실의 보물을 모조리 팔아 원에 뇌물로 바쳤고 그로 인해 이후 고려의 재정은 회복불능에 빠지고 말았다.
사치와 방탕을 유지하기 위해 백성들에게 고리대를 놓았고 미녀가 있으면 귀천을 불구하고 농락하여 후궁이 수백명에 이르렀는데도 서모인 경화공주(慶華公主)와 수비(壽妃) 권씨(權氏)도  욕보였다. 
그에게 욕을 본 경화공주의 밀고로, 조적(曺頔) 등 심양왕(瀋陽王) 일파가 국새를 영안궁(永安宮)에 감춘 뒤 군사 1,000여명으로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평정하였다.
황제도 충혜왕의 이름을 들으면 치를 떨고 고개를 저었다 한다.
이듬해 원나라로 소환되어 형부(刑部)에 투옥되었으며 경화공주의 사건을 심양왕 일당들과 대질하게 되었으나 그를 미워하던 백안(伯顔)의 실각으로 석방되어 귀국했다.
그러나 여전히 횡포가 심하여 백성들을 괴롭히고 재화를 탕진함으로써 나라는 혼란에 빠졌다.
견디다 못한 고려에서는 차라리 왕을 폐위시키고 원의 행성에 편입시켜줄 것을 간청할 지경에 이르렀다.
결국 폐위되어 귀양가다 죽었다. 


반만년 역사상 참으로 짝을 찾기 어려운 개념없는 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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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1-29 22:0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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