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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고구려사] 고구려: 제 2 대 유리명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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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왕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를 부러진 칼을 신표 삼아 찾아 가는 동화 속의 주인공, 한국판 테세우스.

사랑을 잃고 황조가를 읊조리는 낭만주의자.

겁 많은 큰아들은 병으로 잃고, 과격한 둘째 아들은 자살하게 하고, 총애하던 넷째는 물에 빠져 죽는 등

여섯 아들 중 반을 가슴에 묻은, 실존적 고뇌를 많이도 겪은 아버지.

참으로 에피소드가 풍부한 양반인데...

 

이 양반은 추모가 동부여에서 사고치고 다닐 때 만든 자식으로 아버지 없이 자랐다.

아버지가 미운 오리새끼였는데 아들이 백조대접을 받았을 리는 없으므로,

생과부가 된 어머니 예씨 부인과 어렵게 살았을 것이다.

그래도 유리걸식하며 떠돌지 않고 씩씩하게 자란 것을 보면, 이쁜 할머니 유화의 도움이 컷었나 보다.

기원전 24년 유화부인이 죽고 유화의 흑기사 금와왕이 따라 죽는 바람에 살기가 힘들어졌는지,

아니면 새로 왕이된  대소와 뭔가 안 좋은 일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기원전 19년 유리는 어머니를 모시고 장도에 올라 그동안 소식한 줄 없는 졸본의 잘난 아버지를 찾아간다.

 

아버지로 추정되는 아저씨에게, 일곱 모난 돌 위, 소나무 아래 즉 주춧돌 위 기둥 구멍에서 찾아낸 칼 조각을 내밀자,

고구려의 왕 노릇을 하고 있던 이 아저씨는 자신이 보관하고 있던 칼과 맞춰 보았고, 그러자 칼에 피가 통하면서 서로 이어졌다고 한다.

유리는 이어서 햇빛을 타고 하늘로 오르는 해모수급의 재주를 보여주어 아들로 인정을 받고 태자가 되었다 한다. 

재미있는 이야기이기는 한데, 그동안 예씨 부인은 뭐하고 있었을까? 오랜만에 만난 남편인데..

 

모든 신화가 그러하듯이 허황된 이야기는 당시 상황의 은유일 가능성이 크므로,

유리가 등장한 후 발생한 고구려의 정세 변화 즉 소서노 모자의 탈출이라든가, 동명성왕의 때 이른 죽음 등을 살펴보면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

 

유리가 동명성왕을 찾아갈 때 하필 칼조각을 가지고 갔다는 것은 일종의 무력을 상징하는 것으로

달랑 모자만 찾아간 게 아니라 동반한 세력이 있었다고 추정할 수 있을 것이고,

동명성왕이 보관하고 있던 칼 조각과 아귀가 맞았고 피가 통했다는 것은

유리의 세력과 일부 고구려의 세력이 제휴하였는데, 이 제휴한 세력이 예전에 추모와 같이 행동했던

오이, 마리 협부로 대표되는 선배 동부여 세력을 의미하는 것일 수 있다.

그리고 유리의 햇빛을 타고 하늘로 오르는 신술은 무력의 우위 또는 기선 제압을 의미하는 것일 수 있겠고...

실력에서 밀린 소서노 모자는 추모나 유리가 그랬던 것처럼 졸본을 탈출하였고

실권을 빼앗긴 동명성왕은 실의에 빠져 있다가 5개월 만에 40이라는 아까운 나이에 사망하였다.

그리고 고구려와 동부여의 관계가 악화된 이유는 유리와 대소가 동부여에서 서로 갈등하던 정적이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는 추정도 가능하다.

뭐가 되었건 역사의 진실은 항상 안개 저편에 있으므로 알 길은 없다.

 

왕위에 오른 유리왕은 기원전 18년 송양의 딸을 왕비로 맞이하였으나 바로 죽었고

이듬해에 황조가를 낳게한 그 유명한 화희와 치희를 아내로 맞이하였다.

기원전 9년에는 선비족을 토벌하였다.

기원전 6년, 동부여가 대대적으로 침입하였으나 폭설 덕분에 물리칠 수 있었고

서기 3년에는 오녀산성을 떠나 국내성으로 천도하였고 개국 공신 협보를 좌천시켰다. 

계루부의 본거지에서 왕 노릇하기 불편하였나 보다.

서기 4년에 죽은 첫째를 대신해 둘째 해명을 태자로 책봉하였다.

서기 8년에는 황룡국왕이 해명의 힘을 시험해보려고 강한 활을 선물하였는데,해명이 힘자랑을 하여 황룡국왕을 부끄럽게 하는 바람에,

유리왕이 노하여 해명에게 자결을 명하였고, 열받은 해명은 땅에 창을 거꾸로 꽂아 놓고, 달리는 말 위에서 창날에 몸을 던지는 초원 용사들의 방법으로 자결하였다 한다.

음... 이게 뭔 소리일까?

유리왕은 왜 국위를 선양한 자식에게 자결을 명할 정도로 노하였고, 애비가 그런다고 그렇게 살벌한 방법으로 자살하는 해명은 또 뭐란 말인가?

그리고 황룡국은 웬 듣보잡 국가이고?

도대체 이해가 안가는 일들 투성이인데...알 수가 없다.

서기 9년 대소왕이 사신을 보내 부여를 섬길 것을 종용하였으나 왕자 무휼이 반발하는 바람에 무산되었다.

유리왕의 자식들은 참 말을 안 듣는다.

서기 12년에는 신나라의 왕망과 툭탁거렸고

서기 13년에는 부여의 침공을 무휼이 격파하였다.

서기 14년에는 양맥을 정복하고 현도군의 고구려현을 빼앗았다.

서기 18년, 유리왕이 졸하였다.

 

유리왕은 등장부터 범상치가 않았고, 이해하기 어려운 인생을 살다 간 사람이었다.

유리왕은 성으로 해씨를 썼다고 하고 계루부의 본거지인 오녀 산성에서 국내성으로 천도하는 등 여러가지 정황으로 보아 소노부 출신이라는 견해가 있다.

이를 해씨 고구려설이라 하는데 2000년이 훨씬 지난 지금 실체적 진실을 알기는 어렵다.

진실이 무엇이든 유리왕은 격동의 시대를 치열하게 살아낸 고구려의 2대 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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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5-11 07:3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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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1

마루밑다락방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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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뻥인듯 개뻥아닌 개뻥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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