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사] 고구려 : 제 3 대 대무신왕
본문
그냥 무신도 아니고 대무신.
왕이 어떤 인생을 살면 이런 어마무시한 시호를 가지게 될까?
이름은 무휼.
유리왕의 셋째 아들로 어머니는 송양의 딸이라 한다.
기록에 있는 유리왕의 첫째 부인인 송양의 딸은 결혼 후 1년도 못살았고 그 다음 부인은 화희, 치희인데,
그 짧은 기간에 쌍둥이도 아닌 아들들을 어떻게 셋씩이나 낳았을까?
치희가 도망가고 다시 맞아들인 왕비가 또 송양의 딸이 아니었을까?.
셋째 아들이면서도 왕위를 이을 수 있었던 이유는 위의 두 형과, 유리왕이 사랑했던 동생이 이런 저런 이유로 흉사한 까닭일 것이고.
영특, 총명하였고 큰 지략이 있었다고 한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이미 6살에 외교에 두각을 나타내었고.
10살에는 친히 군사를 이끌고 나가 매복 작전이라는 고난도의 전술을 펼쳐 막강한 부여군을 박살내었고.
11살에 태자로 책봉되어 국정을 맡아 보았으며
15살에 유리명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는데..음..아마도 형들이 한 일 것이다.
해명의 업적이 조작된 것이 아닐까?
아무튼 이렇게 믿기 힘든 기록을 가진 대무신왕은 즉위 3년차부터 이름값을 하기 시작한다.
일단 동명왕묘를 세워 정통성을 내외에 천명하였고, 거루라는 좋은 말을 얻었는가 하면,
대가리가 하나에 몸뚱이가 둘인 붉은 까마귀를 보내, 복속을 권유하는 대소왕에게 외교적 망신을 주었다.
재위 4년
연료가 필요 없는 솥을 얻었고, 금도장과 병기를 얻었으며, 괴유, 마로 등의 인재를 영입하였다.
이런 여러 가지 득템을 한 후 동부여를 공격하였는데,
괴유가 대소왕의 머리를 베는 등 초반에는 선전하였으나, 결국 막강한 부여군에 포위되어 겨우 탈출하는 망신을 겪었다.
그래도 전쟁으로 얻은 성과는 비교적 짭잘하여, 대소왕 전사 후, 대소의 동생이 압록곡 부근에 갈사부여를 세웠으며,
대소의 사촌동생이 부여 백성 1만 여 명을 데리고 고구려에 귀순하는 등
동부여는 혼란과 분열로 약화되었고, 대신 고구려가 지역의 강자로 떠오르게 되었다.
재위 9년에는 개마국을 정벌하고, 구다국의 항복을 받았다.
재위 11년에는 요동 태수의 침략을 받아 위나암성에서 농성하였는데,
적이 수 십일을 포위하며 고사 작전을 쓰자, 연못에서 잉어를 잡아 보내어 퇴각하게 하였다.
- 성안에 물이 많으니 헛수고 그만하라는 뜻이다 -
재위 14년에는 낙랑을 정벌하여 멸망시켰다.
자체 경비 시스템인 자명고를 둘러 싼 호동왕자와 낙랑공주의 애절한 사랑이야기로 잘 알려진 전쟁인데.
그 유명세에 비해 실체적 진실은 아직 논란이 많으므로 반 신화로 생각하면 될 것이다.
사랑을 위해 아버지를 배신하는 딸... 신화의 흔한 주제이다.
불쌍한 낙랑국왕 최리는 배신한 딸을 죽이고 항복하였고, 멸망한 낙랑의 유민 5000명은 신라로 투항하였다고 한다.
낙랑 정벌에 혁혁한 공을 세운 왕자 호동은 시기를 받아, 모후와 간통하려 했다는 추문에 휩싸였고,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자살하였다 하는데...자살하면 결백이 증명되나?
재위 15년에는 후한의 광무제에게 사신을 보냈고, 신나라 때 왕망이 하구려라고 낮추었던 국명을 다시 회복하였다.
중국 놈들... 남의 나라 이름을 제멋대로..
재위 27년에는 후한 광무제의 바다를 건넌 공격에 낙랑을 도로 빼앗겼고,
빼앗긴지 한 달 만에 향년 41세로 서거하였다.
전쟁 중에 입은 부상으로 죽은 듯하다.
삼국사기에는 없으나 삼국유사 기록에는 신라도 침공하였고,
후한 광무제와 9년간 전쟁을 벌이기도 하였으며,
동해까지 영토를 확장하였다 한다.
실체적 진실은 알 수 없으나, 시호로 보아 생애의 대부분을 전쟁으로 보낸 듯하며,
가장 사랑했던 아들이자 든든한 후계자였던 호동을 자살하게 만들 정도로 가정사도 복잡한,
들어가나 나가나 전쟁인, 처절한 인생을 산 정복 군주였다.
내, 외정 모두 모험을 심하게 즐겼다는 평가도 있으나
부족국가 수준의 고구려를 지역의 강자로 키우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
[마루밑다락방의 서고] 초승에 뜨는 달은 ‘초승달’이 옳다. 물론 이 단어는 ‘초생(初生)’과 ‘달’이 합성한 경우이나, 어원에서 멀어져 굳어진 경우 관용에 따라 쓴다는 원칙에 따라, ‘초승달’이 올바른 표현이다. 마치 ‘폐렴(肺炎), 가난(艱難)’ 등과도 같은 경우이다.2015-05-25
-
[인문학] 아일랜드... 예이츠의 고향. 가장 늦게 도달한 기독교(카톨릭)에 가장 심취하였고 중세 수도원 운동이 크게 부흥하여 역으로 대륙에까지 영향을 미쳤던 곳... 중국보다 성리학에 더 미쳤던 한국..자본주의의 실험재료가 되어, 자국의 식량이 부족하여 백성은 굶어죽는데도 영국으로 식량을 수출해야 했던 나라. 맬더스 인구론의 근거가 됐었고.. 영국의 식민지였으며 분단의 아픔을 격고 있는 나라.. 참 한국과 비슷한 점이 많은 나라입니다.2015-04-16
-
[인문학] 러셀... 현대의 소크라테스...2015-04-15
-
[인문학] 비극적이고 치명적인 대가를 치른 후였다.-------------전이겠지요.2015-04-09
-
[인문학] 신영복 교수... 진정 겸손한 글을 쓰는 분이지요.소외 당한 자, 시대의 약자들에 대한 이해가 깊은 분이고. 그들을 대변 또는 위로할 수 있는 몇 안되는 작가들 중의 하나이지요.2015-04-08
-
[인문학] 좋군요....2015-04-07
-
[인문학] 과학이 본연의 임무대로 오류들을 이리저리 쳐내가다 보니 알맹이가 하나도 안 남은 형국이되었습니다. 그러니 과학 때문에 목적을 상실했다는 말이 나왔고, 도구에 불과한 과학이 미움을 받는 묘한 지경이 되었습니다만... 그게 과학의 잘못은 아니지요. 만들어진 요리가 맛이 없는게 잘드는 칼의 잘못입니까? 재료가 형편없었던 까닭이지요.2015-04-05
-
[인문학] 물론 ‘목적 없는 세계’라는 아이디어가 ‘신앙의 부재’와 반드시 일치할 필요는 없겠지만, 어떤 목적으로 움직이는지 회의를 주는 세계는 신앙심을 약화시키는 무신론을 철저히 방조하고 있음엔 틀림없는 것 같다. -------------음... 아직 옛날 습관이 남아있는 어투이군요...전지전능의 무한자는 인간이 알 수 있는 대상이 아닙니다. 즉 불가지의 존재이지요. 이 불가지의 존재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있는지도 당연히 불가지입니다. 과학은 이 불가지의 세계를 다루지 않습니다. 그랫다가는 오컴에게 면도날로 난도질 당합니다. ㅋㅋㅋ2015-04-05
댓글목록1
마루밑다락방님의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