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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백제사] 백제 3 : 다루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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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2대왕

온조왕의 아들로 알려져 있으나,

이어진 루자 돌림 왕들의 시작으로, 비류계 왕통의 시작으로도 본다.

이게 뭔 소리 일까?

온조의 아들이면 온조계지 왜 비류계라는 말이 나올까?

 

기록이 부실하니 상상에 의존하여 나름대로 추리를 해보면,

소서노의 전 남편 우태는 북부여 왕 해부루의 아들이었고, 소서노는 졸본 부족장 연타발의 딸이었다.

둘의 결혼은 정략결혼이었을 것이고, 초원의 유목민들은 데릴사위제가 일반적이었으므로 우태도 징기스칸처럼 데릴사위 노릇을 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집으로 돌아가기도 전에 죽었는데 병들어 죽었는지 맞아 죽었는지는 모른다.

그때 소서노는 아이가 있었으나 남편이 죽었으므로 시집으로 들어가질 않고 그냥 남았다.

온조는 없었을 가능성이 더 많다 .

비록 소부족 국가라 해도 명색이 왕자인데 아이를 둘씩이나 데리고 데릴 사위노릇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쨌든 애 하나 딸린 소서노는 주몽을 만나, 역시 정략결혼으로 다시 시집을 갔고, 온조를 낳았다.

결국 온조와 비류는 동복이부 형제인 것이다.

징기스칸의 예에서 보듯이 유목민들 사이에 이런 상황은 비일비재하므로 특별히 흠이 되거나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찌 되었건 이럭저럭 잘살고 있던 소서노 일가는, 유리라는 복병을 만나 시련에 휩싸이게 되고, 지지자들과 남쪽으로 탈출을 하게 된다.

 

이 탈출 집단의 구성은 어땠을까?

유리의 쿠데타 설을 믿는다면 유리에 반발하는 세력은 다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우선 다 따라가지는 않았을 테니, 토착세력의 일부가 주력이었을 것이고, 주몽의 세력 중에도 일부는 따라갔을 것이므로  

당연히 파벌을 형성하였을 것이다.

파벌들은 입장에 따라 농경파와 교역파로 나뉘었는데,

교역파는 항구를 선호하였고 농경파는 내륙을 선호하는 등

정착할 지역을 고르는 문제부터 시작해서 사사건건 대립하였을 것이고, 급기야는 갈라지게 었을 것이다.

 

갈라진 두 집단은 무력충돌도 불사하였고, 처음에는 비류쪽이 우세하여 온조가 고전을 하기도 하였으나, 결국 온조가 우세를 점하게 되었다.

비류쪽에서는 온조의 우세를 인정하고 숙이고 들어갔으나 다음 대 왕위를 요구하였고,

말갈에 시달리던 온조는 조카를 양자로 받아들이며 수용하였다.

이렇게 된 것이 아닐까?

 

진실이야 어디에 있건, 다루왕은 선왕의 뒤를 이어 49년간 재위하였다 한다.

온조왕도 재위 기간만 46년인데, 이게 말이 될까?

무슨 복에 백제의 초기 왕들은 이렇게 오래 살았단 말인가?

매일 전쟁으로 날이 새고 졌는데...

한 사람만의 재위 기간이 아닌 세력의 집권 기간이 아니었을까?

아니면 누락된 왕이 있거나.

 

진실은 여전히 아리송하지만 기록에 의하면

다루왕은 선왕의 뒤를 이어 말갈과 열심히 싸우며,

영토를 확장하여 청주에 성을 쌓았고,

신라의 석탈해 이사금과도 여러 번 싸웠다 한다.

이 당시 백제나 신라의 상황이나 역량이,

서로 접경하여 기병을 수천씩 동원하여 교전할 정도였는지는 의문이지만,

아무튼 그렇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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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5-11 07:3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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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1

마루밑다락방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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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그렇다고 한다...
뭔가 웃기면서도 의문이 생기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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