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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일반

당나라 : 3차 여당 전쟁 : 고구려의 멸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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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전쟁 이후에 당나라는 내부의 정치투쟁 등의 이유로 준동하지 않았고

신라도 백제부흥군에게 골머리를 앓느라 한동한 잠잠하였다.

그런데 긴장이 풀어져서 그랬는지 연개소문이 사망하였다.

 

연개소문은 고구려 대 귀족 중의 하나인 연 씨 가문의 수장으로서 영류왕을 시해하고 정권을 잡은 인물이었다.

명분이나 사정이야 어떻든 그것이 당의 침공의 빌미가 되었고

비록 다 막아내었다고는 하지만 온 나라가 전쟁터가 되어 상상을 초월하는 전력 및 국력손실이 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수장인 연개소문에 대한 불만을 불렀고,

호랑이등에 올라탄 격인 연개소문은 독재자가 되어 철권을 휘두를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희생자를 양산하였을 것이고. 민심 이반으로 이어졌을 것이다.

연개소문의 생전에는 그럭저럭 누르며 끌고 갔을 것이나 죽고 나니 사정이 달라졌다.

연개소문의 뒤를 이은 것은 장남 연 남생이었다.

그런데 고구려의 사정은 연 남생의 능력으로는 통제가 어려울 지경이었고

설상가상으로 두 동생 연 남건과 연 남산이 형에게 반란을 일으킨다.

조정과 백성들은 당연히 동요하였고

동생들에게 쫒겨 국내성으로 피신한 연 남생은 당에 지원을 요청하는 사태에 이르게 되었다.

연개소문... 자식교육을 도대체 어떻게 시킨 거란 말인가.

 

고구려 정벌을 거의 단념하고 있던 당 고종은 웬 떡이냐 하고 달려들었고

이적, 글필하력, 설인귀 등에게 군사를 주어 고구려를 침략하게 하였다.

남생의 배신은 고구려에 치명적으로 작용하였고 666년. 이 세적이 이끄는 당의 주력부대가 참전하면서 절망적이 되었다.

667년 필사적인 항전에도 불구하고 10월 신성이 함락되고 부근의 16성이 함께 당에 항복했다.

연 남건의 분투는 설인귀에게 5만의 병사가 도륙 나는 것으로 좌절되었고 요동방어선이 붕괴되었다.

연 남건이 압록강 방어선에서 당 군을 저지하는 동안 안시성 군 3만이 당 군을 기습했으나 실패했고.

668년 2월 이세적과 설인귀가 부여 성을 함락시켜, 부여 주가 모두 당에 항복했다.

연 남건은 부여 성 탈환을 위해 5만 병력을 보내 이세적과 설하수에서 교전했으나 3만 이상의 병력이 전사하는 대패를 당했다.

압록강 방어선마저 돌파한 당 군은 고구려의 도읍 평양성을 포위했고

한 달 남짓 포위가 이어지자 보장왕은 연 남산을 보내 당 군에 항복했다.

연 남건은 여전히 포기하지 않고 농성을 이어갔으나 이적과 내통한 연 남건의 심복 신성이 성문을 열었다.

10월에 보장왕과 남건·남산 형제 등 20여만 명이 당나라로 끌려가면서 700년 고구려의 역사가 막을 내렸다.

 

고구려는 비록 이렇게 끝이 났고 그들이 지배했던 영역은 그 이후로 우리 민족의 품에 안긴 적은 없으나

여전히 우리 민족의 정신적인 영토로 존재해 왔고,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민족의 개념은 근대에 형성된 것이고, 고구려의 구성 민족을 보면 현재의 우리와 정확하게 일치하지 않으므로

너무 집착하는 것은 좋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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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5-11 07:3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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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2

마루밑다락방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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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나라의 멸망이 좋지는 않지만, 그래도 변화가 필요한 법, 멸망이라는 변화로 발해라는 나라가 생겨났고 발해라는 나라가 또 고구려를 잇는 대강국 그리고 새로운 문화를 만들었지...
난 한 나라의 멸망이 나쁘다고도 보지 않는다...

아온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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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호... 맞는 말일세...역사는 우연과 필연에 의해 그렇게 흘러 가는 것... 역사에서 무엇을 배우고 느낄 것인 가는 개인마다 다르고 상황에 따라 달라지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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