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일반

영화로 다시쓰는 이순신 (부제 : 영화 "명량"을 보고 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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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 다시쓰는 이순신
(부제 : 영화 "명량"을 보고 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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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는 필자가 영화 '명량'을 보고나서 갑자기 그냥 생각이 나서 적은 글로 사실을 바탕으로 썼습니다. 이 글을 읽고 나시면 영화 '명량'의 내용이 궁금해지실것이고 이미 보신 분들이라면 더욱 재미있으실겁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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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량해전은 당시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 을 지휘관으로 전라남도 해남군 화원 반도와 진도 사이에 있는 좁은 해협 '명량해협'에서 벌인 해전이다
이때 조선 수군 판옥선 13척, 협선 32척으로 200척이 넘는 일본군에 비해 조선 수군이 불리한 입장이였다.
하지만 불리한 입장에도 불구 전선에는 피해가 없으며 전사자 및 부상자 4명 혹은 73명으로 대승을 이룬 전투였다.
당시 선조 30년 (1597) 음력 9월 16일 이였다. (양력 10월 25일)

그런데 원래 이순신은 원균 등을 비롯, 일부 서인 세력의 모함으로 삼도수군통제사에서 파직, 백의종군중이였다.

그리고 새로운 삼도수군통제사는 원균되었다
하지만 칠천량 해전에서 대패하여 조선은 많은 병력과 전선을 잃었으며 조선은 제해권을 상실하였다.

이에 선조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자 이순신을 다시 복권하여 삼도수군통제사에 기용하였다. 그런데 선조는 이순신을 복권하는 대신 품계를 내려 조선 수군 지휘체계의 혼란을 야기하였다.
당시에 수년간 전쟁으로 계급 인플레가 심했으며 수군 수사의 기준, 정3품을 가진 장수들이 넘쳐났다.
따라서 계급은 같은데 보직이 다른 경우가 일어났고 이순신이 통제영을 장악했던 세월이 길어 그의 영향력이 미쳤기에 그나마 군이 통제가 되었지만 각 장수들의 불만이 쏟아져 내려왔다 특히 김억추와의 충돌이 잦았다고 한다.

이처럼 조선 수군 지휘체제는 엉망이였다. 앞에서 이미 말했지만 200척이 넘는 일본군에 비해 조선 수군은 남은 전선이 12척에 불과 하였다. 참고로 회령포에서 전선 10척, 나머지 2척을 이순신이 거두었으니 12척이다

이렇게 불리한 수군을 선조는 폐지하려고 하였으나, 이순신은 수군폐지불가론을 올려 수군의 폐지를 막았다.

그후에 이순신은 남해안 일대를 돌아다니며 수군 재건에 전력을 다하였다.
이때 어란포의 일본 수군 '구루시마 미치후사' 와 '도도 다카토라' 등이 지휘하는 병력이 333척을 보유하고 있었다.

당시에 일본 측은 간단히 말해 목포측을 흐르는 북서류를 타고 명량해협을 건너 전라도로 서진하여 일본 육군 측과 합류할 계획이였으나, 명량 해협 특정상 진도와 화원 반도 사이의 좁은 수로로 조류는 국내 수로 중에서 가장 빠른 곳이다. 따라서 잔존하는 조선 수군을 격파 후 앞에서 말했듯이 일본 육군에 합류해 한양으로 진격하려고 했던 것이다.

당시 상황은 칠천량 전투에서 일본군이 승리함으로써 일본군의 사기가 높았다.
따라서 일본의 압도적인 전력으로 이순신 수군을 격파할 것을 결의 했다.

한편 이순신은 일본 수군의 기동 보고를 받고 장병들과 명량해전 직전 죽기를 각오하고 싸울것을 결의 했다.

그래서 명량해협의 옛 명칭 울돌목으로 접전하여 결전을 벌일 계획이였다.
하지만 일본 수군 탄생이라 말할수 있는 시코쿠 미야쿠보 지역이 명량해협과 비슷한 곳으로 엄청난 조류가 흐르며 물의 속도 또한 명량 못지 않았다고 한다.
따라서 조선 수군을 단숨해 제압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순신은 그리 호락호락 하지 않았다.
이순신은 일본 측에서 조선군을 가볍게 보고 있음을 이용, 일본군을 유인하려고 했다.

음력 9월 7일 벽파진 근처에서 일본 수군의 소함대를 격파했다. 이때 일본은 조선수군이 12척임을 일고 완전히 조선수군을 제거하려고했다.

그런데 조선수군의 12척 전선이 해협으로 들어서 일본 수군을 맞이하였다.
근데 중간에 조선 수군 일부가 적의 기세에 밀려 겁을 먹고 뒤로 물러서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순신이 탑승한 기함은 계속 자리를 고수하며 부하들을 독려했고, 초요기를 올려 뒤로 물러나있던 중군장 첨사 김응함과 거제도 현령 안위를 진격해 오도록 한 뒤, 그들을 심하게 다그쳤다. 두 사람의 배가 적진으로 공격하기 시작하자 평산포 대장 정응두와 멀리 대략 1킬로미터 정도 물러나 있던 전라우수사 김억추도 돌격에 가세했다. 특히, 안위의 군선으로 일본 수군의 공격이 집중되었다. 격전의 와중에 대포와 화살에 맞아 일본군들 일부가 바다에 빠졌는데 이 광경을 보고있던 이순신 기함에 탑승하고 있던 항왜 준사(俊沙)가 "저기 그림무늬 붉은 비단 옷을 입은 자가 바로 적장 마다시(馬多時,구루시마)다"라고 알렸다.

이순신은 물긷는 병사 김돌손을 시켜 즉시 구루시마를 끌어올릴 것을 명했다. 갈고랑쇠에 낚여 배 위로 끌려 올라온 적장 구루시마 미치후사는 곧바로 토막내어졌으며, 조선 수군의 사기는 급격히 올라갔다. 반면에, 전투 중에 지휘관이 적군에 의해 참수되고 토막난 것을 본 일본 수군의 사기는 떨어졌다.

일본군에게 또 하나의 악재로, 오후가 되자 점차 조류의 방향이 바뀌기 시작하였다. 이번에는 조류의 방향이 조선 수군에는 순조(順潮)가 되고, 일본 수군에 역조(逆潮)가 되어, 일본 수군에게 대단히 불리한 상황이 조성되었다. 역류가 흐르는 상황에서 군선이 첨저선이었던 일본 수군은 배가 선회하려면 많은 공간이 필요했다. 그러나 좁은 해협에 많은 수의 전선을 끌고왔던 일본 수군에게 급한 역류가 흐르는 상황에서 배를 운신하며 전열을 정비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웠다.

따라서 조선 수군은 포격과 충파를 거듭하였으며, 도도 다카토라 일본수군 총사령관은 부상을 당했다.

하며, 결국에는 333척의 대함대를 고작 12척이 추격하는 꼴이 됐으며 총사령관이 부상을 입은것을 보아 일본 본대도 피해가 있음을 보인다.

나중엔 일본 수군쪽으로 부는 바람을 이용, 퇴각하였다.

명량해전은 조선군의 대승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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