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1년(고종 18년)2월 26일 조선왕조실록 기사
2015-04-19 0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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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도(慶尙道) 유생 이만손(李晩孫) 등 만 명이 올린 연명 상소의 대략에,“방금 수신사(修信使) 김홍집(金弘集)이 가지고 온 황준헌(黃遵憲)의 《사의조선책략(私擬朝鮮策略)》이라는 1권의 책이 유포된 것을 보니, 저도 모르게 머리털이 곤두서고 가슴이 떨렸으며 이어서 통곡하면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단(異端)으로 사람들을 미혹시킨 자에 대한 처벌은 왕법(王法)에 나타나 있고 그 무리에 가담한 자를 먼저 다스려야 한다는 가르침은 《춘추(春秋)》에 실려 있으니, 이것을 따르면 다스려지고 이와 반대로 하면 혼란해진다는 사실은 영원히 어길 수 없는 것입니다.생각건대 우리 왕조는 역대 임금들이 계승하면서 유도(儒道)를 높이고 중시하여 오늘날에 이르렀으니 3대(三代) 이후로 유도가 이처럼 융성한 적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사악한 예수교라는 것이 해외의 오랑캐 종족들에게 나와서 예의나 염치는 물론 말할 것도 없고 윤리와 강상(綱常)이 일체 없어져버리니 다만 하나의 짐승이나 하나의 개, 돼지가 되어버렸습니다.우리 정종(正宗), 순조(純祖)로부터 헌종(憲宗)에 이르기까지 선대 임금들이 이루어 놓은 법을 후세의 임금이 계승하여 어기는 자는 반드시 죽이고 용서하지 않았으며 잘못을 저지른 자는 작은 죄라 하더라도 용서하지 않았으므로 요망한 난적(亂賊)들이 모두 주륙되었습니다.우리 전하가 즉위하자 선대 임금의 뜻과 사업을 계승하여 병인년(1866) 강화도(江華島)의 변란 때에 크게 토벌하니 추악한 무리들이 놀라서 도망쳐 버렸습니다. 그런데 10년도 되기 전에 흉악하고 너절한 말이 한창 무성하게 퍼져서 이전에는 은밀히 서로 꾀던 자들이 지금은 방자하게 책을 쓰기까지 하고 이전에는 사적으로 서로 전습(傳習)하던 것을 지금은 버젓이 드러내놓고 우리에게 주면서 그것은 주공(周公), 공자(孔子)의 말씀보다 낫고 정자(程子)와 주자(朱子)의 문구(文句)와 같다고 하니, 어찌 이리도 성현(聖賢)을 모욕하고 어찌 이리도 나라를 욕되게 한단 말입니까?그런데도 임금 앞에 나가서 이것에 대해 아뢰려는 자도 있고 등대(登對)하여 전파시키려는 자도 있으니, 아! 예로부터 임금이 준 옷을 입고 임금이 주는 밥을 먹으며 선비의 의관을 차리고 사신의 임무를 받고서 모든 사람들이 우러러보는 위치에 있으면서도 나라를 욕되게 하는 글을 가지고 와서 전하에게 아뢰고 성인을 모욕하는 말을 은밀히 조정에 퍼뜨리며 적의 세력을 장황하게 설명하여 임금의 마음을 두렵게 하고 여러 나라 사이에 균형을 지킨다는 설(說)을 빙자하여 사람들의 입을 틀어막는 자는 과연 어떤 사람들입니까?더구나 선대 임금은 그처럼 엄하게 배척하였는데 전하께서는 용납해서 받아들이며 병인년에는 그처럼 엄정하게 토벌하였는데 오늘날에는 너그럽게 받아들이니, 신은 전하께서 장차 무슨 면목으로 선대 임금께 우러러 아뢰며 후세에 할 말이 있으실지 감히 알지 못하겠습니다. 다시 이른바 《사의조선책략(私擬朝鮮策略)》이라는 책을 가지고 조목조목 따져 보겠습니다.그 말에 의하면, ‘조선의 오늘날 급선무는 러시아를 방어하는 것보다 우선시되는 것이 없는데, 러시아를 방어하는 대책으로는 중국과 친교를 맺고 일본과 결속하고 미국과 연합하는 것보다 좋은 방법이 없다.’라고 하였습니다.중국으로 말하면 우리가 번국(藩國)으로 자처해 왔고 신의(信義)로 교류한 지 거의 200년의 오랜 시일이 지났습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황제(皇帝)’요, ‘짐(朕)’이요 하면서 두 존칭(尊稱)을 태연하게 사양하지 않고 받으며 그런 말을 한 사람을 용납하고 그런 사람의 글을 받아두었다가 만일 중국에서 이것을 가지고 따지면서 시끄럽게 떠든다면 무슨 말로 해명하겠습니까?일본으로 말하면 우리가 견제해야 할 나라입니다. 국경 요새지의 험준하고 평탄한 지형을 그들이 이미 잘 알고 있으며 수로와 육로의 요충지를 그들이 차지하고 있는 터에 우리의 대비가 없는 것을 엿보고 함부로 돌격한다면 어떻게 막아내겠습니까?미국으로 말하면 우리가 원래 잘 모르던 나라입니다. 그런데 공공연히 그의 부추김을 받아 우리 스스로 끌어들여서 바다를 건너고 험한 길로 미국에 가서 우리 신료들을 지치게 하고 우리나라의 재물을 썼는데도 만일 그들이 우리나라의 헛점을 알고서 우리가 힘이 약한 것을 업신여겨 따르기 어려운 청으로 강요하고 댈 수 없는 비용을 떠맡긴다면 장차 어떻게 응대하겠습니까?러시아로 말하면 우리와는 본래 아무런 혐의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공연히 남의 이간술에 빠져 우리의 위업을 손상시키면서 먼 나라와 사귀고 이웃 나라를 도발하게 하는 전도된 행동을 하다가 헛소문이 먼저 퍼져 이것을 빌미로 삼아서 병란의 단서를 찾는다면 장차 어떻게 수습하시렵니까?또 게다가 러시아나 미국, 일본은 모두 같은 오랑캐들이니 후하고 박한 차이를 두기가 어렵고, 러시아는 두만강(豆滿江) 한 줄기로 국경이 맞닿아 있는데 이미 실시한 일본과의 규례를 따르고 새로 맺을 미국과의 조약을 끌어대면서 와서 거주할 땅을 요구하고 물화를 교역하기를 요청하면 장차 어떻게 막겠습니까?또 더구나 세상에는 일본이나 미국과 같은 나라가 헤아릴 수 없이 많은데 각 나라들이 서로 이 일을 본보기로 하여 땅을 요구하고 화친을 청하기를 일본과 같이 한다면 또한 어떻게 막겠습니까? 허락하지 않는다면 지난날의 성과는 다 없어지고 원수가 되며 여러 나라의 원망이 몰려들어 적이 되어버리는 것이 러시아 한 나라에 그치지 않을 것이며, 허락한다면 세계의 한 모퉁이인 청구(靑邱)에 장차 수용할 땅이 없게 될 것입니다.진실로 황준헌의 말처럼 러시아가 정말 우리를 집어삼킬 만한 힘이 있고 우리를 침략할 뜻이 있다고 해도 만 리 밖의 구원을 앉아 기다리면서 혼자서 가까이 있는 오랑캐 무리들과 싸우겠습니까? 이것이야말로 이해관계가 뚜렷한 것입니다. 지금 조정에서 무엇 때문에 백해무익(百害無益)한 일을 굳이 해서 러시아 오랑캐에게는 본래 생각지도 않았던 일을 생각하도록 만들고 미국에서는 원래 계책으로 삼지도 않은 일을 계책을 삼게 하여 병란을 초래하여 오랑캐를 불러들이게 합니까?그는 또 말하기를, ‘서학(西學)에 종사하고 재물 모으기에 힘쓰고 농사를 장려하는 데 힘쓰며 상공업에 힘써야 한다.’ 하였습니다.대체로 재물과 농공(農工)은 선왕(先王)의 좋은 제도와 아름다운 규범이 있습니다. 백성들은 위로하여 모여들게 하면서 덕을 베풀고 재물을 손상하지 말고 백성들을 해치지 않는다면 백성들은 항상 편안할 것입니다. 절약하는 것으로 제도를 삼아 먹는 것을 적게 하고 쓰는 것을 남게 한다면 재물은 항상 풍족할 것입니다. 무익한 일을 해서 유익한 일에 손해를 주지 않으며 다른 나라의 기이한 물건 때문에 본국의 재화를 천시하지 않는다면 공인(工人)들은 언제나 고무될 것입니다.당요(唐堯), 우순(禹舜) 때에는 집집마다 어진 사람이 살았고 성주(成周)에서는 집에는 식량을 쌓아두고 여행할 때면 전대를 걸머지고 다녔으며 한(漢) 나라에서는 창고에 곡식이 붉게 썩어갈 정도이며 돈꿰미는 썩어났으니, 이것으로 하여 백성들은 용감하면서도 나아갈 방향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무엇 때문에 선왕의 도리를 버리고 다른 묘책에 힘을 쓰겠습니까? 더욱 분통스런 것은 저 황준헌이라는 자는 중국에서 태어났다고 말하면서도 일본에서 연사(演士)로 행세하고 예수를 믿어 자진하여 사문난적(斯文亂賊)의 앞잡이가 되고 짐승과 같은 무리가 되어 버렸으니, 고금천하(古今天下)에 어찌 이런 이치가 있습니까? 혹시 지난날에 법망을 빠져나간 큰 괴수가 강화도의 실패에 분격해서 병력으로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요행수로 차츰차츰 먹어 들어가려는 욕심을 부려서 점차로 우리를 물들이려는 간계가 아니겠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달콤한 말로 유인하는 것이 극도에 이르렀고 위태로운 말로 위협하는 것에 힘을 다하였는데 또 무엇 때문에 ‘예수교를 전교(傳敎)하는 것이 해롭지 않다.’는 말을 끝머리에 붙이겠습니까? 그 심보를 알 만합니다.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깊이 생각하고 판단해서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은 우선 쫓아버리고 그 책은 물이나 불 속에 집어던져 호오(好惡)를 명백히 보이며 중외(中外)에 포고(布告)해서 온 나라의 백성들로 하여금 전하의 뜻이 무엇인가를 알게 하고 주공과 공자, 정자와 주자의 가르침을 더욱 밝혀 사람들이 모두 임금을 위하여 죽을 각오를 가지게 하며 백성들의 마음으로 성(城)을 삼아서 더럽고 요사스런 무리들이 간계를 부릴 여지가 없게 한다면 우리나라의 예절 있는 풍속을 장차 만대에 자랑하게 될 것입니다.”하니, 비답하기를,“간사한 것을 물리치고 바른 것을 지키는 일에 어찌 그대들의 말을 기다리겠는가? 다른 나라 사람의 《사의조선책략》의 글은 애당초 깊이 파고들 것도 없지만 그대들도 또 잘못 보고 지적함이 있도다. 만약 이것에 빙자하여 또다시 번거롭게 상소하면 이는 조정을 비방하는 것이니, 어찌 선비로 대우하여 엄하게 처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대들은 이 점을 잘 알고 물러가도록 하라.”하였다.--------위 내용은 1881년 영남만인소에 관한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입니다. 이만손이 유생 만명의 서명을 얻고 왕에게 상소한 '영남만인소'의 내용을 대충 보면 청나라의 하급 외교관 황준헌의 [시의조선책략] 에 반대되는 내용이라는 것을 금방 알수 있습니다. 황준헌의 시의조선책략에서는 조선은 중국(청)에 의지하고 미국과 일본과 화친하며, 러시아를 견제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시의조선책략]과 대조되는 영남만인소는 위에 나온 것처럼, 서양의 여러 국가들과 일본은 의지할수 없고 신뢰도가 떨어지니 수교해서는 안되며 청나라와의 관계를 더욱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이러한 주장을 담고 있는 영남만인소는 고종에게 올려졌습니다. 그러자 대사헌 한경원이 이만손의 영남만인소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고, 양사와 홍문관도 이에 동의하자, 고종은 동년 5월 18일, 이만손을 유배했습니다. 그 뒤로 이만손에 대해 많은 논란거리가 되었으나, 앞에서 말한 유배형으로 인해 사건은 일단락되었습니다. 영남만인소 사건에서 1년이 지난 후, 조선은 [시의조선책략]의 내용대로 미국과 수교를 맺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남에게 준 혜택을 우리한테도 주라는' 이른바 최혜국 대우가 포함되었지요.p.s) 영남만인소 사건에 관한 조선왕조실록의 기사는 많이 있으나, 사건의 원인이 위의 기사에 있기에, 그 내용을 올려보았습니다.[본 게시물은 MAY랑 마루밑다락방 사이트 간에 맺어진 교류협정에 의거하여 올려지는 글입니다.]* 역사학 자료실-고려사 게시판에다가 올려놓았는데, 게시물을 이동해 주셨으면 합니다. 죄송합니다..
[이 게시물은 마루밑다락방님에 의해 2019-09-25 11:24:01 한국사 연대기에서 이동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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