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 : 최강의 정복자 징기스칸
본문
몽골하면 여러가지가 떠오른다.
흉노, 선비, 돌궐, 위그루, 유연, 거란, 여진,.... 고구려는 아니고...혹시 부여는?
징기스칸....음...
몽골이라는 말은 원래 초원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시베리아 숲지역에서 나와 초원이 정착한 별볼일 없는 가난한 부족의 이름이었다.
이 별볼일 없는 부족에서도 유난히 찌찔한 보르지킨 씨족의 자손 중에 징기스칸이라는 걸출한 인물이 나와 초원을 통합하면서
지멋대로의 이름으로 불리는 몽골의 각 부족들을 하나의 문화 공동체로 묶었고 그 이후 초원 자체의 이름이 되었다.
따라서 몽골족이란 혈연 공통체가 아니라 여러 민족이 잡다하게 얽힌 문화공동체를 이른다.
몽골 초원은 이 도둑놈들이 모여있는 초원이라는 뜻이다.
역대 북방의 패자들은 몽골을 기반으로 하여 중국과 대립하였다.
다른 곳에서 흥기하여 몽골을 먹기도 했고 몽골에서 세력을 키워 다른 지역까지 확장하기도 했으나
어쨋든 몽골을 가지고 있는 세력이 당대 북방의 패자로 군림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몽골은 북방민족의 성지와 같은 땅이다.
몽골을 잃고 서역으로 쫒겨난 민족들이 유럽에서 그 난리를 친 것을 보면 당시에 몽골을 포함한 동북아시아의 무력 수준을 짐작할 수 있다.
몽골 초원은 세계사의 대부분의 시간 동안 최강의 무력을 상징하는 지역이었고 몽골을 지배하는 자가 그 시대의 최강자였다.
나중에 징기스칸이라는 공포와 위대가 혼재하는 이름을 남긴 인류 역사상 손꼽히는 강자 테무진이 태어난 시기는 12세기말로서 금나라가 몽골 고원을 지배하고 있던 시기였다.
보르지킨 씨족 출신의 테무진은 인생초기 여러가지 좌절을 겪었고 단지 9식구에 불과한 가족의 생계를 걱정하는 처지였다.
노예로 전락했다가 탈출하기도 했고 마누라를 뺏기기도 하는 등 이리저리 쫒기며 참으로 비참한 시기를 겪어야했다.
어찌 어찌해서 운 반 노력 반으로 마누라를 되찾았을 때는 마누라가 다른 놈의 씨를 임신하고 있는 상태였다고 하니 그 인생 초반의 곤궁함을 가히 알 수 있겠다.
이 다른 놈의 씨가 나중에 러시아와 유럽의 정복자가 되는 바투의 아버지 주치이다.
징기스칸이 몽골 초원의 지배자가 되는 과정을 보면 자신의 능력도 대단했지만 상당히 운이 따른 면도 있다.
평생의 지기이자 후원자였으며 실질적 상급자였던 의형제 자무카와 그간 의탁했던 보호자 옹칸을 누른 테무진은
1206년 쿠릴타이에서 징기스칸에 추대되었다.
100만 명 정도의 인구에 2000 마리 정도의 가축을 보유한 가난한 신생국이었다.
새로운 나라의 이름은 예케 몽골 울루스(큰 몽골 나라), 통치자의 칭호는 칭기즈칸이었다.
칭기즈칸은 부족 간 납치와 몽골인을 노예로 삼는 것을 금지시키고, 완전하고 전면적인 종교의 자유를 선포했으며, 칭기즈칸 자신을 포함한 모든 개인보다 법이 우위에 선다는 것을 선언했다...
칭기즈칸은 시베리아 부족과 위구르족까지 친족 관계를 확대하여, 부족이나 민족 전체 단위로 가족적 유대를 맺는 정책을 폈다
나라를 세운 다음 해부터 여러차례 서하를 공격하여 결국 항복을 받았으며
1210년 금나라 사신의 복종 요구를 거부하고. 이듬해 전쟁을 시작해 3년 뒤에 항복을 받는다.
이 패배로 금나라는 수도를 옮겨야 했고 결국 징기스칸의 아들 오코타이에게 멸망하였다.
몽골의 초원이 이렇게 성장하자 남송에서는 금을 없앨 최적의 기회로 생각하고 징기스칸을 지원하였다.
제 딴에는 전가의 보도 이이제이를 시전하여 몽골과 금의 양패구상을 노렸겠지만
징기스칸은 조상의 원수 금과 사생결단을 내어 송의 기대를 채워주기 보다는 자신의 실력을 배양하는데 최선을 다하였다.
금하고는 매년 싸웠으나 전력을 기울인게 아니라 싸우다 말고
서역으로 정벌을 떠나 중앙아시아의 호라즘 왕조를 박살 내고 부를 획득 하는가 하면 돈도 안되는 먼 라시아를 공격하기도 하며 송의 애를 애태웠다.
그나마 송의 구미에 맞는 일은 걸핏하면 송을 뜯어먹던 서하를 박살낸 일이었는데...
서하 2차 공략전 때 징기스칸은 말에서 떨어진 상처가 악화되어 승리를 목전에 두고 죽어버렸다.
징기스칸은 죽으면서 서하엔 풀 한포기 남기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고 그 유언이 철저히 집행된 것이 송에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징기스칸 생전에 정복하고 통치한 땅은 후세의 자식들이 통치한 지역에 비하면 얼마 되지 않는다...그래도 넓긴 넓다.
하지만 징기스칸이 몽골을 통합하고 군제를 정비하고, 야삭을 남겨 법령의 기초를 마련하는 등 기반을 제대로 마련하지 않았다면
징기스칸의 뒤를 이은 귀공자들은 그저 평범하게 목축과 도둑질을 겸업하며 조상들 처럼 살다가 어느 칼에든 맞아 죽었을 것이다.
징기스칸은 키가 크고 몸집이 탄탄하게 생겼으며 눈은 고양이 눈이고 노년에도 흰 머리가 없었으며 성욕이 대단했다고 한다.
그는 천재형의 사람은 아니었고 군사전략가라기 보다는 걸출한 정치가였다는 느낌이드는 사람이다.
그는 공평분배를 실시하여 몽골의 인심을 휘어잡았고 이게 정치적 자산이 되어 거듭된 패배에도 불구하고 권토중래할 수 있었다.
그는 매우 검소하게 살았으며 부하들을 혈육처럼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신분에 구애받지 않고 능력에 따라 인재를 발탁하였고 고아나 과부등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여 초원에 복지시스템을 도입하였다.
전리품을 나눌 때도 매우 공평하여 부하들의 지극한 존경과 사랑을 받았고....
초원의 사람들은 지금까지 본적이 없었던 평등 복지 사회에 열광하였고 힘을 하나로 모을 수 있었다.
평등, 자유, 법치, 박애...프랑스 혁명 이념 + 법치... 인류의 이상이 13세기 몽골 초원에 실현되었다.
몽골 초원은 생산성이 낮은 땅이다.
그런데 어떻게 돈이 많이드는 저 이념을 실현할 수 있었을까?
일단 징기스칸은 스스로 검약했다.. 그는 평시에는 거의 누더기 수준의 옷을 입었으며 일반 병사와 같은 식사를 했다고 한다.
그 다음은 상업을 장려하여 재원을 마련하였고....
그런데 이 정도로 충분했을까?
텍도 없었을 것이다.
통합 전까지야 경쟁자들이 있었으므로 그들을 털어 마련할 수 있었을 것이나...통합 이후에는?
약탈밖에는 답이 없다..
다만 국내는 안되니...국가 단위의 약탈이 주수입원이었을 것이다.
징기스칸의 이상사회를 이루기 위해서는 몽골 국민 100만의 수백배에 달하는 다른 국가 내지 민족 인민의 피눈물이 있어야 했다.
그는 부하들에게, 인생의 가장 큰 즐거움은 적을 추격해 쓰러뜨리고 그들의 소유물을 독차지하여 그 여자들이 울부짖는 소리를 듣는 것이고, 그들의 말을 빼앗아 타고다니고 그 여자들의 몸을 침대와 베개 삼아 노는 것, 이것이 인생의 가장 큰 행복이라고 말했다 하는데...진짜로 징기스칸이 이 말을 했는지는 확실치 않다.
어쨌든 참으로 적나라하고 야만적인 그러나 솔직한 수컷의 고백이 아닐 수 없지만
실제로 약탈의 주목적은 여자가 아니라 이상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재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소리를 우상에게 들은 철없고 무식한 애들이 뭔 짓을 했겠는가?
지들이야 즐거울 지 몰라도 우리나라처럼 당하는 입장에서는 피눈물이 날 일이었다.
징기스칸은 야만인이라고 자신을 표현했다고 하는데
하느님은 중국의 사치와 오만에 실증을 내어 자신들에게 그들을 지배할 운명을 부여했다고 생각했다.
여기서 하느님은 기독교의 하느님과 관계가 없는 텡그리다.
근데 이 텡그리는 고조선과 부여에서도 나타나는 북방민족 공통의 최고신이다.
이 놈의 텡그리가 하필 그때만 나타났고 왜 몽골넘들한테만 미소를 보였는지 알 수는 없지만
그 당시 몽골의 성공을 보면 그런 마음이 들만도 하다.
`우리는 똑같이 희생하고 똑같이 부를 나누어 갖소.
나는 사치를 싫어하고 절제를 존중하오.
나의 소명이 중요했기에 나에게 주어진 의무도 무거웠소.
나와 나의 부하들은 늘 원칙에서 일치를 보며 서로에 대한 애정으로 굳게 결합되어 있소.
내가 사라진 뒤에도 세상에는 위대한 이름이 남게 될 것이오.
세상에는 왕들이 많이 있소. 그들은 내 이야기를 할 거요!”
징기스칸이 남긴 말이라 하는데..
모두가 공평하게 잘먹고 잘살자...약탈해서...이런 이야기이다.
사회주의 또는 공산주의 냄새가 나기도 하는 이 징기스칸의 이상은 당대의 몽골 젊은이들을 흥분시켰고
징기스칸은 그들을 조직하여 최강의 군대로 만들었다.
징기스칸...징그럽기도 하고 대단하다는 생각도 들고...참 생각할 게 많은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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