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의 정복 전쟁 : 남송
본문
징기스칸은 송의 군사력을 우습게 생각하고 금나라를 최대의 적으로 생각했다고 한다.
그런데 금나라가 너무 쉽게 무너지자 송은 그냥 거저 먹을 수 있는 대상으로 생각하였을 것이다.
아마도 징기스칸의 자식들도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고 가벼운 마음으로 말을 몰고 강남으로 향했을 것이다.
그런데 정주민의 종주국 송의 저항은 의외로 완강하여 몽골의 정복 역사상 최장 기간 , 최악의 전쟁을 치뤄야했다.
시작은 남송의 도발이었다.
남송의 입장에서는 금나라 정벌을 위해, 길도 열어줬고 막대한 군량도 제공했으며,
마지막 채주 포위전 때 한팔 거들기도 했으므로 댓가를 기대하고 있었는데
몽골이 줄 생각을 안하니 열받기도 하였을 것이다.
송은 20만을 동원하여 개봉에 입성하게 한다.
그런데 개봉은 몽골의 철저한 약탈로 빈껍데기만 남아 있었다.
송군 20만이 졸지에 배고픈 거지떼가 된 것이다.
이 거지떼에게 난폭한 이리떼와 같은 몽골군이 달려 들었다.
승부는 명약관화 몽골의 완승으로 끝났다.
문제는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1235년 2월, 쿠릴타이에서 송의 도발에대한 응징이 결의된 것이다.
전쟁 초기 몽골군은 파죽지세로 남송을 밀어부쳤는데 35년 10월 성도가 떨어지고,
다음 해 3월 양양이 함락되었으며 1237년이 되자 몽골군은 동쪽으로 황주에 도달하게 되었다.
이 초기의 승전이 바투의 유럽 원정을 가능하게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송에는 명장 맹공이 있었다.
남송은 맹공을 중심으로 극렬한 저항을 하였다.
맹공은 강릉에 대한 공격을 막아내고, 오히려 몽골군을 연전연파하면서 양양 일대를 다시 수복하고,
기주를 되찾았으며, 사천으로 가서 몽골군을 또 다시 막아내었다.
기병의 발목을 잡는 하천과 수로가 많은 지형, 엄청나게 많은 인구, 빼곡하게 세워진 요새들,
끝도 없이 나오는 풍부한 전쟁 물자, 습하고 뜨거운 기후와 풍토병 등등,...
6년간 악전고투를 벌이던 몽골군은 오고타이가 사망하자 회군하였다.
사실상 최초의 패전이었다.
이대로 포기할 몽골이 아닌 것을 아는 송은 사천 지방에만 10여개의 성을 새로 쌓아 올리며 대비를 단단히 하였고.
오고타이의 뒤를 이은 구육칸은 바투와 갈등하느라 송에 쳐들어 갈 생각을 못했고..
구육의 뒤를 이은 몽케가 남송 침략의 바톤을 잇는다.
1258년 몽케의 친정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이번에도 쉽지 않았다.
사천의 조어성에서 발목이 잡힌 것이다.
조어성은 5개월여에 걸친 공략에도 끄덕이 없었고 몽골군의 피해는 속출하는데
날씨마저 덥고 습해 군중에 전염병이 돌고 몽케마저 병에 걸려 죽어버리고 만다,
그래서 회군...
또 패전한 것이다.
몽케의 죽음을 들은 서아시아의 홀레구가 귀환하였는데...
그틈을 타서 공격해온 맘룩왕조에게 아인 - 잘루트 전투에서 패배하여 몽골군의 서진은 이 시점에서 종료되었다...어째 몽골이 예전만 못해졌다.
몽케가 죽고난 후 고민에 빠진 또 한 사나이 쿠빌라이가 악주에 남아 자신의 지원세력인 홀라구와 수부테이의 아들을 기다렸는데,,,
아릭부케가 쿠릴타이를 소집해 버렸다.
그래서 별수없이 귀환한다.
다행히 남송의 권신 가사도의 묵인하에 쿠빌라이 세력은 무사히 귀환할 수 있었다...음 가사도 욕먹어 싸다.
그런데 쿠릴타이에게 참가도 하기 전에 아릭부케가 대칸위에 선출 되었다.
이에 열받은 쿠빌라이도 소외된 자기 세력을 모아 대칸을 선언하였고...대칸이 둘이 되어버렸다...
그 다음엔 지들끼리 치고 받느라 남송 공격은 생각도 못했고..
어찌 어찌 아릭부케를 처단하고 유일한 대칸이 된 쿠빌라이는 남송공격을 재개한다.
이번에는 적전을 바꾸어 양양 공격에 집중하게 되고..
그런데 양양은 전략적 요충지라 방비가 든든하였고
남송에서도 양양의 중요성을 아는지라 총력을 다해 방어하였으므로 양양은 쉽게 함락되지 않았다.
해를 넘기는 공격에도 끄떡없는 양양 공략을 위해 번성을 먼저 공략하는 쪽으로 작전을 바꾸었고
이 작전이 주효하여 드디어 양양을 함락할 수 있었다.
공격을 시작한지 무려 6년만의 일이었다..
송의 대문이 활짝 열린 것이다.
이후 바얀이 이끄는 20만의 몽골군은 그야말로 파죽지세
1276년 남송은 항복, 결국 멸망하고 말았다.
40년의 처절한 항쟁은 황족 몰살, 인구의 절반 감소, 전 국민의 천민화라는 결과를 남기고 비극적으로 마무리 되었다.
문천상이라는 충신이 있어 그나마 그 결말의 초라함을 위로하였다.
-
[마루밑다락방의 서고] 초승에 뜨는 달은 ‘초승달’이 옳다. 물론 이 단어는 ‘초생(初生)’과 ‘달’이 합성한 경우이나, 어원에서 멀어져 굳어진 경우 관용에 따라 쓴다는 원칙에 따라, ‘초승달’이 올바른 표현이다. 마치 ‘폐렴(肺炎), 가난(艱難)’ 등과도 같은 경우이다.2015-05-25
-
[인문학] 아일랜드... 예이츠의 고향. 가장 늦게 도달한 기독교(카톨릭)에 가장 심취하였고 중세 수도원 운동이 크게 부흥하여 역으로 대륙에까지 영향을 미쳤던 곳... 중국보다 성리학에 더 미쳤던 한국..자본주의의 실험재료가 되어, 자국의 식량이 부족하여 백성은 굶어죽는데도 영국으로 식량을 수출해야 했던 나라. 맬더스 인구론의 근거가 됐었고.. 영국의 식민지였으며 분단의 아픔을 격고 있는 나라.. 참 한국과 비슷한 점이 많은 나라입니다.2015-04-16
-
[인문학] 러셀... 현대의 소크라테스...2015-04-15
-
[인문학] 비극적이고 치명적인 대가를 치른 후였다.-------------전이겠지요.2015-04-09
-
[인문학] 신영복 교수... 진정 겸손한 글을 쓰는 분이지요.소외 당한 자, 시대의 약자들에 대한 이해가 깊은 분이고. 그들을 대변 또는 위로할 수 있는 몇 안되는 작가들 중의 하나이지요.2015-04-08
-
[인문학] 좋군요....2015-04-07
-
[인문학] 과학이 본연의 임무대로 오류들을 이리저리 쳐내가다 보니 알맹이가 하나도 안 남은 형국이되었습니다. 그러니 과학 때문에 목적을 상실했다는 말이 나왔고, 도구에 불과한 과학이 미움을 받는 묘한 지경이 되었습니다만... 그게 과학의 잘못은 아니지요. 만들어진 요리가 맛이 없는게 잘드는 칼의 잘못입니까? 재료가 형편없었던 까닭이지요.2015-04-05
-
[인문학] 물론 ‘목적 없는 세계’라는 아이디어가 ‘신앙의 부재’와 반드시 일치할 필요는 없겠지만, 어떤 목적으로 움직이는지 회의를 주는 세계는 신앙심을 약화시키는 무신론을 철저히 방조하고 있음엔 틀림없는 것 같다. -------------음... 아직 옛날 습관이 남아있는 어투이군요...전지전능의 무한자는 인간이 알 수 있는 대상이 아닙니다. 즉 불가지의 존재이지요. 이 불가지의 존재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있는지도 당연히 불가지입니다. 과학은 이 불가지의 세계를 다루지 않습니다. 그랫다가는 오컴에게 면도날로 난도질 당합니다. ㅋㅋㅋ2015-04-05
댓글목록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