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구 3 : 충정왕
본문
고려 충정왕 2년 : 1350년
고려를 망할 때까지 괴롭힌 왜구와의 대혈전이 막이 올랐다.
1350년 2월, 왜구는 현재의 경상남도 고성을 통해 들어와 죽림, 거제를 연이어 공격하였다.
이때 최선, 양관 등이 왜구와 전투를 벌여 3백여명의 왜구를 죽였고 하는데
죽은 놈들만 300명이면 도대체 얼마나 쳐들어왔을까?
왜구의 대규모 공세를 처음 받은 조정에서는 이권을 경상ㆍ전라도 도지휘사로, 유탁을 전라ㆍ양광도 도순문사로 삼아 왜구의 다음 공격에 대비하게 하였다.
두달 뒤, 4월에는 전라남도 순천 앞바다에 무려 100여척의 왜선이 바다를 뒤덮으며 나타났는데
이놈들은 순천을 약탈한 뒤 퇴각한 것이 아니라 섬진강을 타고 내륙 깊숙히 진군하여
조운선을 모조리 약탈하며 남원으로 향하였다.
남원 뿐만이 아니라 당연히 다른 지역도 공격을 받았는데
구례처럼 남원을 공격하는 길목에 있었던 곳도 있었지만, 배를 타고 남해안을 거슬러 가야 하는 장흥,
심지어 서해안을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영광까지 약탈 당하였다.
서남해안 전체가 모조리 당한 것이다.
이 때 이권, 유탁 얘들은 뭘하고 있었을까?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멀건히 구경만 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실컷 분탕질을 치고 유유히 돌아가는 왜구와 손가락 빨고 있는 고려군...
참으로 한많은 고려의 백성들이 이닐 수 없다
만만한 싹을 본 왜구는 바로 다음 달에 66척의 함선으로 또다시 순천부를 공격했다.
이때 고려군은 왜구를 공격했는데, 한 척을 나포하고 13명을 죽이는데 그쳤다.
한 척을 나포했다고 해서 나머지 65척이 모두 가라앉았을 리는 없었으므로,
이 함선들은 고스란히 다른 지역을 공격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다음 달인 6월 왜구는 현재의 경상남도 마산인 합포에 20여척의 규모로 나타나 합포를 유린하고,
몇달전 왜구의 공격을 받은 고성을 다시 한번 공격하였다.
이놈들은 단순히 약탈만 한 것이 아니라 고려군의 군영에 불을 지르기 까지 하였다.
얼마나 만만하게 봤으면...에휴...
이권, 유탁....임지에 있기나 했을까?
11월 동래군을 공격했다.
지속적이고 전방위적인 왜구의 침탈이 불이 붙은 것이다.
충정왕 3년인 1351년 8월에는 왜선 130여척이 서남해를 거슬러 공세를 퍼붓기 시작했다.
이 대규모 왜선이 공격한 지역은 자연도와 삼목도로, 현재의 인천광역시 관할 구역에 해당한다.
이 왜구들은 각 지역을 초토화시켰고 현재의 수원까지 공격했다.
수도권이 공격당하자 놀란 조정에서는 만호 인당과 전 밀직 이권으로 하여금 왜구를 격퇴하게 하였으나
이권은 자신은 장수가 아니라는 이유로 싸움을 거부하는 추태를 보였다.
도대체 이권의 어디를 보고 이렇게 계속 중용했을까?
충정왕은 이 해에 너무 어린나이라 나라를 다스리는데 문제가 많다고 하여 왕위에서 쫒겨나는데
이게 다 왜구놈들의 등쌀에 그렇게 된 것이다.
충혜왕의 서자로 태어나 13살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라 이리저리 치이다 15살에 쫒겨나서
피어보지도 못하고 이듬해에 독살 당한 가련한 아이 충정왕...명복을 빈다.
1350년, 이 운명적인 해부터 고려 왕조가 역사상에서 사라진 1391년까지,
장장 40여년 동안 총 394건의 왜구의 침공을 받았는데
왜구의 침입이 없던 해는 1353년, 1356년, 1368년, 1386년, 단 4년이었다
이 시기의 왜구들은 과거 13세기의 왜구들이 남해안 지역을 약탈하고 곧 물러갔던 것에 비하여,
약탈 이후에도 연안 도시에 체재하거나 내륙 깊숙히 진공하여
고려의 지방 행정을 완전히 마비시키는 등 고려의 존립을 위협하였다.
당시의 고려는 충자 돌림 왕들로 상징되는 원간섭기로 국운이 크게 쇠한 상황이었고
북으로는 홍건적과 몽골의 잔당들이 공격해 오고 있는 위기 상황이었으므로
이러한 왜구의 공격은 국가에 최악의 피해를 안겨줄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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