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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일반

거란의 2차 침입 : 안습의 현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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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는 1차 침입 후 거란과 형제지의를 맺고 즉각 송과의 교류를 끊었으나

조약을 맺고 채 반년도 되지 않은 994년 6월 송나라에 거란을 증오한다는 국서를 보냈으며,

997년에는 고려가 중화를 사모하고 있으나 오랑캐 거란에 막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는 국서를 보내는 등

계속해서 송에 비밀리에 사신을 보냈다.

 

고려 성종이 997년 38세로 조선 성종과 같은 나이에 죽고 비운의 왕 목종이 즉위하였다.

목종은 게이였다고 하는데 즉위 초에는 상당히 영명한, 기대가 되는 군주였으나

어머니 천추태후와 그 내연남 김치양의 등쌀에 정치에 뜻을 잃고 방황하다가

강조의 쿠데타로 제위를 잃게 되는, 비극적 인생을 살게 되는 인물이다.

고려 최초의 폐위된 왕이기도 하다.

 

1009년 목종이 살해되고 그동안 죽을 고비를 숱하게 넘기며 억지 중노릇을 하고 있던 사생아 출신 현종이 즉위하였다.

한반도의 성종들과는 다르게 명줄이 긴, 거란의  명군 성종은 어머니 복도 있었다.

요 성종의 어머니 소태후는 수렴첨정기간 동안 고려를 억누르고, 송을 윽박질러 전연의 맹약을 맺는 등 대단한 활약을 하며

거란을 패권국으로 만들어 자식에게 물려주었다.

걸출한 여걸 어머니에게 잘 배우고 친정을 시작한 젊은 군주에게  고려의 혼란상은  야심을 자극하였을 것이다.

반면에 고려는 1010년 쿠데타의 주역인 하공진과 유종의 멍청한 짓으로 여진에 깊은 원한을 만들었고,

여진은 거란에게 복수를 부탁하며 강조의 정변을 알리게 되었다.

이에 거란 성종은 목종의 시해를 트집 잡아 40만 대군으로 친정을 시작하였는데

소태후의 사망 후 1년도 안되었으니 그의 치세의 시작이 고려정벌인 셈이다.

 

고려는 여러 차례의 해명이 소용이 없자 전쟁을 각오하였다.

실권자인 참지정사 강조가 총사령관이 되고 고려 전역의 병력을 있는 대로 긁어모아 30만 대군으로 통주를 지켰다.

거란군의 진격은 서희가 요새화시킨 강동 6주 때문에 순조롭지 못했는데

특히 흥화진은 일주일 이상 공략하고도 양규, 정성 등이 이끄는 방어군의 거센 저항으로 함락시키지 못했다.

거란 성종은 수비군을 무로대에 남기고 남진하여 통주에서 강조가 이끄는 고려의 주력군과 대결하게 되었는데,

고려군은 초반에 선전하였으나 방심하여 강조를 비롯한 수뇌부가 일망타진 되고 말았다.

체포된 강조의 장렬한 죽음을 포함하여 죽은 자가 3만 명에 이르렀다고 하니

사실상 고려의 주력은 여기에서 소멸되었다

.

통주가 함락된 이상 서경의 방어가 중요해졌으므로

현종은 시간을 끌기 위해 거짓 항복을 하는 한편

거란군을 막기 위해 동북면 도순변사 탁사정과 함흥의 중랑장 지채문을 서경으로 급파했다.

먼저 도착한 지채문이 탁사정과 합류해서 서경으로 입성하기 위해 서경 인근 성천에서 대기하였는데

서경은 이미 자체적으로 항복을 결정하고 항복 사절이 거란으로 출발한 상태였다.

지채문은 항복사절을 추격해 살해하고 항복문서를 불태웠고.

이어 탁사정의 동북면 군이 서경에 도달하여 서경의 혼란을 진압하였다.

탁사정은 서경을 접수하기 위해 오는 거란의 기병을 급습, 몰살을 시켜버렸고,

거짓 항복에 분노한 성종은 거란군에 서경 총공격을 명령하였다.

그런데 거란의 공격을 받은 탁사정은 군대를 이끌고 도망쳐 버리는 어이 없는 짓을 저질렀다.

지휘부와 주력군이 하룻밤 새에 증발하는 황당한 사태에 직면한 서경은 잠시 혼란에 빠졌지만

중간급 간부인 강민첨과 조원의 활약으로 서경을 지켜낼 수 있었다.

이때 두각을 나타낸 강민첨이 후일 3차 거란전쟁 시 고려군 부원수가 된 그 사람이다.

 

한편 흥화진을 고수하던 양규는 정예 700기를 뽑아 출격, 일단 적에게 빼앗겼던 곽주를 탈환 주둔하고

성 주민 7천여 명을 통주로 옮겨 작전지역을 넓혀 나갔다.

전쟁이 교착상태에 빠지자 거란은 곽주, 통주, 서경의 요충지를 후방에 그대로 방치한 채 개경을 향하여 남하한다.

이 대담한 결단에 고려 조정은 경악하지만, 강감찬 등의 주장으로 항전의 뜻을 굳히고 왕의 몽진을 결정하였다.

그러나 이 피난길에서 신하, 병사, 노비들은 다 달아나 버리고

현종과 두 왕비를 수행하는 이는 지채문등 신하들과 금군 50여명이 전부였다고 한다. 

주전론을 펼쳤던 장수들마저 태반이 왕을 버리고 도망가 버린 것이다.

 

현종의 몽진은 참으로 안습이었는데 현종에 비하면 조선 선조의 몽진은 우아하였다.

경기 연천 단조역에서는 역졸을 비롯한 역인들이 습격을 해왔고

창화현에서는 고을 아전의 멸시와 놀림을 받았다.

이러저러한 우여곡절 끝에 현종 곁에 남은 사람은 두 왕후와 몇몇 시녀 그리고 지채문 밖에 없었다.

초년고생을 심하게 했던 현종은 그래도 끝까지 굴하지 않고 거란 군이 물러날 때까지

전라도 전주, 광주, 나주까지 계속 도망한다.

 

거란군은 수도 개경을 함락하고 약탈과 방화를 자행한 후 현종을 잡기 위해 남으로 군사를 내려 보냈다.

현종은 화친 밖에는 길이 없었고, 재수 없는 아전 놈에게 농락 당한 창화현을 조금 벗어나서 만난 하공진을 거란에 보내게 되었다.

현종의 표문을 얻어 거란군 쪽으로 향하던 하공진은 창화현 관아에 닿기도 전에 거란군 선봉과 조우하였는데

거란 선봉과 현종 일행의 거리는 십수 리에 불과하였다.

기가 막힌 타이밍이었다.

만약 사절이 하루만 늦었어도 현종은 거란 선봉의 밥이 되었을 것이다.

그랬으면 고려는 발해 꼴이 났을 것이고 우리 역사는 아주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하공진은 거란군의 안내를 받아 성종을 만난 후

고려의 남방은 수천 리에 달하며 고려왕은 이미 그 밖까지 도주하였다고 거란 성종을 속인다.

퇴로를 걱정하던 거란 성종은 이 말을 믿고 고려왕의 친조를 조건으로 하공진을 인질로 잡아 퇴각한다.

하공진은 요로 잡혀간 후 전향을 거부하여 살해되고 말았다.

 

한편 통주, 귀주 등지를 확보하여 적진 후방을 위협하고 있던 양규 휘하의 고려군은 퇴각하는 거란군에 타격을 가하였다.

적병 1만 명을 격살한 귀주별장 김숙흥의 대전과를 필두로,

무노대 전투에서는 적 사살 2천, 포로 3천,

이수 석령의 추격전에서 적 사살 2천 5백, 탈환인 1천,

여리참 전투에서 사살 1천, 탈환 1천여,

애전 전투에서 사살 1천여의 전과를 올리는 등 거란에 막대한 손실을 강요하였다.

이러한 양규의 부대들의 선전 덕분에 거란은 강동 6주를 점령할 엄두를 내지 못하였고

결국 지켜 낼 수 있었다.

거란군이 철수한 이후 고려는 친조를 다시 한 번 약속하였으나, 이행하지는 않았다.

 

전쟁의 결과 고려는 수도가 함락되고 서북지방이 초토화 되는 큰 피해를 입었다.

거란의 피해 또한 만만치 않아서 관졸이 몰살당하는 바람에 조금이라도 글만 읽으면 특채로 뽑는 상황까지 되었다 한다.

가장 큰 피해는 고래 싸움에 끼인 여진족이었는데

생활 터전이 전쟁터가 되어 초토화되는 바람에 살길이 막막하게 되었다.

고려는 이들을 내지에 집단 이주 시키고 수공업 등에 종사하여 먹고 살게 하였는데

천민이 되었을 것이다.

복수 한 번하려다 민족이 거덜난 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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