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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일반

당나라 : 1차 여당 전쟁 : 안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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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왕조를 양제가 말아 먹는 바람에 중원이라는 사슴은, 같은 선비족 출신, 이연의 차지가 되었다.

우리 민족에게 어떤 의미에서는 가장 많은 영향을 준 당나라가 시작된 것이다.

창업주의 저주와도 같은 아들들의 골육상쟁의 결과인, 이연의 둘째 아들 태종의 즉위는 고구려에게 암운이었다.

당태종 이놈도 수양제와 비슷하게 주변국들을 정벌하여 모두 굴복시키고 고구려를 노린 것이다.

이 패륜아들에게는 고구려 정벌이 지들 원죄를 씻어내는 세례 비슷한 것이거나 아니면 천하통일 졸업식 같은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고구려로서는 참으로 억울하고도 미칠 노릇이었을 것이다.

 

수나라에게 신물 나게 당한 고구려는 당시 왕이 평양성 전투의 영웅 고건무였음에도 불구하고,

통일된 중국의 힘을 두려워하여 처음부터 저자세로 일관 하였다.

당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 지도를 헌상하는가 하면,

요서에 만든 수나라 전몰 병사의 뼈로 만든 전승기념물을 철거하기도 하고,

태자를 사신으로 보내 입조시키도 하였다.

동시에, 당의 팽창을 경계하며 631년 이후 천리장성을 쌓기 시작하였다.

 

641년 5월, 당태종은 지도제작을 하는 일을 맡은 관리를 사신으로 파견하여 간첩질을 하게 하였다.

이 간첩질은 당태종의 야욕을 드러낸 것으로서, 고창국의 멸망과 더불어 고구려의 불안감을 극도로 자극하였다.

불안감은 내분을 불렀고,..

고구려의 지배층은 강,온파로 나뉘어 대립하게 되었다.

이 와중에 영류왕은 연가의 힘을 꺾으려 하다가 도리어 연개소문에게 피살되고 마는 사태가 벌어진다.

연개소문은 영류왕과 함께 귀족 100여명을 제거하고 조카인 보장왕을 왕위에 올린 후.

자신은 대막리지가 되어 철권을 휘둘렀다.

 

당에 대해 적극적인 화친 정책을 펼쳐오던 영류왕이 연개소문에게 살해당하였다는 소식은

당태종에게 역적 토벌이라는 고구려 침공의 명분을 주었다.

고구려는 명목상 당의 제후국이었으므로 당태종은 우선 외교적 압력을 행사하였고 연개소문이 거절하자 군사를 일으킨 것이다.

골육상쟁의 추악한 권력이 악의 무리를 처단하는 정의의 화신으로 탈바꿈하는 순간이었다.

 

644년 7월, 당태종은 출병에 필요한 군량 징발과 수송에 관한 조처를 취하였고

장검에게 고구려의 방어 상태와 형세를 탐색하게 하였다.

11월, 장량이 4만여 병사를 이끌고 해로로 평양을 향해 진군하였고

이세적이 보·기병 6만과 함께 요동으로 진군하였다.

당태종 자신은 645년 2월 12일, 6군을 거느리고 요동으로 향하였다.

총병력은 20만 정도로 추정된다.

 

645년, 당군은 남도 중도 북도의 세 갈래로 침입하였는데

이세적의 선봉군은 가장 평탄한 북도로 신속히 이동하여 요하를 건넌 후

4월 1일,고구려군의 요하 방어선을 기습적으로 돌파하였다.

이세적은 현도성을, 부총관인 도종은 병력 수천으로 신성을 공격하여 신성 방면의 고구려군을 묶어둔 뒤

주력을 남으로 돌려 개모성을 함락시켰다.

개모성을 함락시킨 이세적은 일부 군을 주둔시켜 신성 방면의 고구려군을 견제하게 한 뒤,

5월에 주력을 남쪽의 요동성으로 진군시켰다.

장검은 남도를 취해 도하한 뒤, 이민족 부대를 거느리고 건안성을 공격하였고,

고구려 지원군 4만을 기병 4천으로 저지하였다.

당태종의 본군은 중도를 취해 요택을 건너 요동성으로 몰려들었고...

 

당태종의 주력이 도착함에 따라 요동성의 상황은 급속도로 악화되었다.

고구려군은 상황이 좋지 않아 무당이 굿까지 하는 등 죽을힘을 다해 싸웠으나 적이 워낙 강하였다.

수양제의 백만 대군에도 그렇게 견고하게 버티던 요동성이, 당태종의 기동력이 가미된 전술에 허망하게도 열흘 만에 무너진 것이다.

당 군은 기세를 살려 연이어 백암성을 함락시켰고.

수군은 요동반도 남단의 비사성을 함락시켰다.

전쟁 초기 고구려를 사정없이 몰아친 것이다.

연개소문... 정신이 없었을 것이다

 

당나라 군대는 개모성에서 백암성이 이르는 넒은 지역을 장악하여 확실한 교두보를 마련하였지만

신성은 계속 실패하였고 건안성과 오골성 역시 함락시키지 못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고구려는 본격적인 반격에 나서게 되는데...

고연수와 고혜진이 전국에서 닥닥 긁어모은 15만 병력으로 당 군과 야전에서 맞붙은 것이다.

이들은 고정의의 신중론을 묵살하고 곧바로 당 군을 공격하였는데

당태종의 전략에 말리고, 술수에 속고, 용맹에도 밀려,

수만 명이 전사하고 작은 구릉에 37000여 병력이 포위되어 항복하고 말았다.

항복한 고구려 장교만 3천 5백여 명이었고,말이 5만필 이었다.

이게 주필산 전투이다.

이 전투에서 설인귀가 두각을 나타내었다.

 

군사적으로 고구려는 사실상 여기에서 끝난 것이었나 고구려의 운명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승리한 당태종은 곧 계획대로 안시성으로 진격하였는데....

당시의 안시성은 다른 성들로부터 별다른 지원을 받지 못하고 있었으며,

성주 또한 연개소문이 쿠데타를 일으켰던 당시에 호응하지 않았던 점 등으로 미루어,

항복을 권유하면 순순히 응할 것 같았으나...

전혀 아니었다.

항복을 거절한 것은 물론 강하게 방어하여 당태종을 오도 가도 못하게 한 것이다.

당태종은 당연히 열 받았고 성이 함락되면 모조리 도륙을 내겠다고 펄펄 뛰었으나

그러건 말건, 안시성은 낮에 철저히 방비를 하는 한편 밤에는 정예병들로 하여금 줄을 타고 성벽을 내려가게 하여 야습을 일삼았다.

당태종은 안시성의 공격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수개월에 걸쳐 흙을 쌓아 토산을 만들고,

토산 위에서 나무와 돌을 날려 안시성의 성벽 일부를 허물었으나

폭우로 인하여 토산이 무너지는 사태가 발생하고 그나마 고구려 병사들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최후의 희망이었던 토산마저 잃어버리자 당태종은 더 이상 싸울 의지를 잃었고 안시성 공략을 포기하였다.

안시성을 떠난 당 군은 결국 퇴각하였는데 퇴로마저 험하여 고생을 많이 하였다 한다.

 

을지문덕에 버금가는 고구려의 구성, 안시성주의 이름을 전하는 기록은 없고 다만 양만춘이라는 이름이 야사에 전한다.

당시 당 군과 안시성 간의 전투는 무척 치열하여 당태종이 이 전투에서 한 쪽 눈을 잃어 애꾸눈이 되었다는 전설이 있고.

이런 참혹한 패배를 경험한 적이 없었기에, 장안으로 돌아온 후에 "위징이 살아있었다면 반드시 나를 말렸을 터인데 그가 내 곁에 없다는 것이 너무나 슬프고 애석한 일이다."라며 한탄하였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이런 전설들과는 다르게 당태종은 수만 명 규모의 원정군을 지속적으로 편성하여

요동에 소모전을 수차례 전개하였고 재차 대규모 원정을 계획하였으나 명이 짦아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죽었다.

 

수양제, 당태종... 비슷한 성향의 인간들이었다.

다만 수양제는 나라를 말아 먹었고 당태종은 내치가 훌륭하여 정관의 치라고 칭송받는 것이 다를 뿐이었다.

그런데 왜들 그렇게 고구려를 못 잡아먹어서 난리를 쳤던 걸까?

같은 흉노 출신들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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