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죽어 있던 영혼의 부활 : <파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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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 있던 영혼의 부활이다 : <파이란>
여객선 한 척이 검푸른 서해 물살을 가르며 연안 부두에 다가선다. 막연한 두려움과 불안한 기대가 뱃머리 양 옆으로 갈라지고, 저 멀리 인천항이 희뿌연 안개 너머로 모습을 드러낸다. 각종 선박 접안 시설물, 컨테이너 크레인, 화물 창고, 여객터미널 등이 낯설기만 하다.
영화 <파이란>은 부모를 여읜 파이란(장바이쯔 분)이 이모를 찾아 인천항을 통해 한국 땅을 밟으며 시작된다. 하지만 차이나타운에 살던 이모는 캐나다로 이민을 떠나 버리고 없다. 난감한 처지에 놓인 중국 처녀 파이란. 그녀는 한국에 계속 체류해 돈을 벌기 위해 삼류 양아치 이강재(최민식 분)와 결혼한다. 물론 위장결혼이다.
결혼 절차는 간단했다. 빨간 머플러를 목에 두른 강재의 사진 한 장만이 파이란에게 주어진다. 강재와 파이란, 이 둘은 호적상 부부지만 실제 부부는 아니다. 강재와 소개소 일당들은 커미션만 챙겨먹으면 땡인 삼류 양아치들이다. 이런 하류 인생들이 파이란을 넘겨 줄 직장이란 뻔하지 않은가?
강원도 유흥업소에 팔려간 파이란은 피를 토하며 폐병을 가장해 가까스로 타락의 굴레에서 벗어난다. 파이란은 바닷가 세탁소에 겨우 취직해 허드렛일을 하면서 열심히 살아 보지만, 불행히도 그녀가 가장한 그 폐병에 정말로 걸려 죽음에 가까이 선다. 남편 아닌 남편, 강재의 사진 한 장만을 간직한 채. 강재를 만나 보지도 못하고 강재의 사랑을 받아 보지도 못하고 파이란은 죽음 앞에 외로이 선다.
삼류 양아치 강재는 어부의 아들로 근사한 배 한 척 마련할 돈을 벌기 위해 인천으로 올라와 양아치 노릇을 하지만, 영 천성에 맞지 않다. 하지만 배 한 척에 대한 꿈을 그는 버리지 못한다.
그러던 어느 날 강재는 그의 보스가 반대파 건달을 살해하는 현장에 같이 있게 된다. 강재와 보스는 살해된 건달을 수장시키지만 시신이 떠오르고 경찰은 살해범을 잡으려 든다. 보스는 강재와 협상한다. 강재의 꿈, 즉 배 한 척을 사 줄 테니, 자기 대신 옥살이를 해 달라는 협상을. 양아치 노릇으로는 도저히 배 한 척을 살 가망이 없다고 판단한 강재는 보스의 협상에 응한다.
바로 그때, 강재는 파이란의 부고(訃告)를 받는다. 강재는 남편 자격으로 장례 절차를 밟으러 파이란이 일했던 강원도 바닷가 외진 마을로 간다. 삼류 양아치 강재가 단 한 번도 아내라고 생각해 본 적 없는 파이란을 만나러 간다. 터널을 지나며 간다. 터널을 지나자 팔려 가는 파이란에 대한 기억이 강재의 무의식 속에서 양심의 몸을 일으킨다.
http://tvpot.daum.net/v/mnRQDXncUuk%24
파이란의 시신을 확인하고 화장해, 유골 가루 상자를 들고 그녀가 기거하던 방을 둘러보는 강재는 괴롭다. 세탁소 할머니는 파이란이 강재에게 남긴 편지를 건네준다. 바닷가 방파제 위에서 강재는 파이란의 편지를 뜯고 읽어 나간다.
“강재 씨에게
이 편지를 강재 씨가 보시리라 확신이 없어 부치지 않습니다. 이 편지를 보신다면 저를 봐 주러 오셨군요. 감사합니다. 하지만 나는 죽습니다. 너무나 잠시였지만 강재 씨의 친절, 고맙습니다. 강재 씨에 관하여 잘 알고 있습니다. 잊어버리지 않도록 보고 있는 사이에 강재 씨 좋아하게 됐습니다. 좋아하게 되자 힘들게 됐습니다. 혼자라는 게 너무나 힘들게 됐습니다. 죄송합니다.
당신은 항상 웃고 있습니다. 여기 사람들 모두 친절하지만 강재 씨가 가장 친절합니다. 나와 결혼해 주셨으니까요. 강재 씨, 내가 죽으면 만나러 와 주실래요? 만약 만난다면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 당신의 아내로 죽는다는 것 괜찮습니까? 응석부려서 죄송합니다. 제 부탁은 이것뿐입니다. 강재 씨, 당신에게 줄 수 있는 것 아무것도 없어서 죄송합니다.
세상 어느 누구보다 사랑하는 강재 씨, 안녕!”
http://tvpot.daum.net/v/z2X6H8USyAs%24
망자(亡者)가 된 아내 파이란이 죽기 전 자신에게 보낸 편지를 다 읽은 강재는 오열한다. 이 영화 최고의 장면이다.
http://tvpot.daum.net/v/CgSBfWoX8n8%24
세상이 ‘삼류’라고 하는 이강재가 아니라, 파이란이 ‘사랑’이라고 말하는 이강재가 오열한다. 파이란이 되돌려 놓은 양심의 인간 이강재가, 이제 더 이상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그녀에게 울어 주어야 할 울음을 울어 준다.
그리하여 그 울음 속에서 이강재는 부활한다. 해맑게 웃는 이강재, 친절한 이강재, 아내로 살게는 해 주지 못했지만 아내로 죽게는 해 주며 파이란의 넋에 사죄하는 이강재, 아무것도 해 준 것이 없어 죄송해 하며 죽어간 파이란이 이 세상 무엇보다 소중한 것을 주었음을 깨닫는 양심의 인간 이강재가 그 울음 속에서 부활한다.
파이란의 유골가루를 들고 인천으로 돌아온 강재는 이제 더 이상 삼류 양아치가 아니다. 때리고 부수고 공갈하고 유흥업소 삐끼질이나 불법 비디오 대여로 돈 벌어 근사한 배 한 척을 마련하려는 삼류 인생의 굴레에서 빠져나온 것이다. 당연히 강재는 보스 대신 옥살이를 할 생각이 없다. 그는 낙향을 결심한다.
자취방을 함께 쓰는 후배 경수와 마지막 인사를 나눌 무렵, 보스는 경수를 불러낸다. 보스는 경수를 살해할 것이다. 그리하여 경수의 입을 막을 것이다. 경수에게 죄를 뒤집어씌울 것이다.
자취방에 홀로 남은 강재는 경수 몰래 용돈 몇 만 원을 남기고 가려고 상자를 뒤지다 ‘파이란 봄 바다’라고 제목을 달아 놓은 비디오 테잎을 발견한다. 강재는 비디오 플레이어에 그 테잎을 넣고 재생 버튼을 누른다. 파이란이 동해 백사장에서 고향 노래를 부르는 아름다운 장면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아! 나를 사랑해 준 단 하나의 여자. 이제 다시는 만날 수 없는 내 단 하나의 여자. 내가 내팽개쳐 버린 만남을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만남으로 간직했던 내 단 하나의 아내, 파이란! 이 척박한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만남은 만남이 얼마나 고귀할 수 있는지 가르쳐 주는 사람과의 만남이다. 강재와 파이란의 만남처럼.
강재는 웃음 짓는다. 이제껏 살아온 삶이 슬픈 웃음을 짓는다. 그리고 아름다운 파이란의 노래 소리를 듣는 것이 그의 삶의 마지막이 된다. 보스의 조직원이 강재를 목 졸라 죽인다.
온 방에 파이란의 유골 가루가 흩어지고, 화면 속 파이란의 노래도 끝난다. 다시는 되돌려 재생시키지 못할 파이란의 아름다운 노래와 수줍은 웃음도 멎는다. 강재의 마지막 숨도 멎는다. 하지만 결코 멎지 않는 것이 있고, 관객은 그것을 안다. 파이란의 한없는 사랑과 강재의 부활이 상징하는 ‘인간의 인간에 대한 가치’가 바로 그 결코 멎지 않는 것임을.
안녕! 아름답게 죽어간 사람들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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