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만남은 계산기를 두드리지 않는다(1) : <귀여운 여인>
본문
진행 중인 모스 기업 인수 작업을 매듭짓기 위해 헐리우드에 사는 변호사 필립의 파티에 참석한 에드워드 루이스(리차드 기어 분)는 기분이 우울하다. 방금 전 교제 중인 연인에게 차였기 때문이다. 이유는 그의 무능이 아니라 도리어 유능 때문! 그는 누군가를 사랑하고 사랑받기엔 너무 바쁘다.
에드워드는 홧김에 필립의 차를 빌려 타고 투숙한 호텔로 간다. 기사가 운전하는 리무진밖에 탈 줄 모르는 백만장자 에드워드가 수동기어가 달린 스포츠카 에스프리를 몰고 지리도 모르는 헐리웃 거리들을 지나 리전트 비버리 윌셔 호텔로 향한다. 물론 운전은 삐걱거리고 길도 잃는다.
어쩌면 지금 그가 원하는 것은 호텔로 무사히 가는 것이 아니라 거리를 헤매는 바로 그것일지도 모른다.
위태로운 거리의 남자 에드워드는 우연히 창녀 비비안(줄리아 로버츠 분)을 만난다. 그녀도 귀한 인생을 거리에서 몸을 팔며 헤매고 있다. 에드워드는 20달러를 주고 그녀에게 길 안내를, 아니 아예 운전을 부탁한다. 비비안은 표준 H형 에스프리 스포츠카를 몰 줄 안다. 에드워드가 못하는 일이다.
매사에 용의주도한 사업가 에드워드는 문득 깨닫는다. 자신이 못하는 것을 비비안이 할 줄 아는 것이 그저 스포츠카 운전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계산이 깔린 말을 하기보다는 와일드하고 천진난만하게 행동하고, 교양 있게 꾸미기보다는 날것으로 존재하는 그녀는 생생하게 살아 있는 것이다.
고소공포증이 있으면서도 호텔에 투숙할 때 최고급 펜트하우스만을 고집하는 에드워드는 묘한 충동에 이끌려 비비안과의 하룻밤을 산다. 물론 쾌락을 위해서가 아니다. 그랬다면 거리의 창녀가 아니라 자신의 격에 맞는 최고급 콜걸을 불렀을 것이다. 어쨌든 백만장자와 창녀의 만남은 이렇게 동화처럼 이루어졌다.
다음 날 모스 기업의 창업주가 에드워드와의 면담을 요청하고, 에드워드는 여자를 데리고 가라는 필립의 충고를 듣는다. 정에 이끌리지 않고 냉정하게 기업을 인수해야 하는 에드워드는 비비안이 적격의 여자라고 판단해, 그녀를 일주일 동안의 파트너로 고용한다. 대가는 3천 달러다.
일주일 동안 에드워드의 여자가 되어야 하는 비비안. 그녀는 에드워드가 외출하면서 주고 간 현금을 들고 비싼 드레스를 사기 위해 로데오 거리 옷 매장에 들어가지만, 점원으로부터 천대를 받는다. 그녀의 옷차림 때문이다. 호텔에 돌아온 비비안은 지배인 톰슨에게 도움을 청하게 되고, 그는 비비안을 요조숙녀로 만들어 준다.
에드워드가 호텔로 돌아온다. 하지만 그는 톰슨의 배려로 상류사회 여인의 껍질을 입은 우리의 귀여운 여인, 비비안을 에드워드는 못 알아본다. 이런! 옷 한 벌이, 겨우 옷 한 벌이 한 여인의 정체성이라니! 에드워드의 눈은 너무나 오랫동안 ‘여인의 진짜’, 그리고 ‘진짜 여인’을 보지 못했던 것이다. 여기서 에드워드는 이미 실격의 인간인 셈이다.
모스 기업의 창업주와 그의 손자 데이비드, 에드워드와 비비안, 이렇게 네 사람이 함께한 고급 레스토랑. 에드워드는 모스 기업의 최대 주주로서 단도직입적으로 자신의 입장을 표명한다. 모스 기업을 쪼개 팔 것이며, 정계와 이미 로비가 끝났으니, 자신에게 저항할 수 없을 것이라고. 모스 기업의 창업주와 그의 손자는 발끈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고, 에드워드는 마음이 무겁다.
호텔로 돌아온 비비안과 에드워드는 허심탄회한 이야기를 나누며, 점점 가까워진다. 비비안은 모스 기업 창업자와 그의 손자를 좋아한다. 이유는 아주 단순하다. 할아버지와 손자가 서로 사랑하는 감정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녀는 냉정한 사업가 에드워드도 자신과 마찬가지로 그들을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간파한다.
에드워드는 지난 10여 년 동안 아버지와 사이가 안 좋았고, 최근 돌아가신 아버지의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그는 ‘가족애 결핍자’인 것이다. 에드워드는 여기서 다시 한 번 실격의 인간이 된다. 에드워드는 호텔 바에서 새벽까지 피아노를 친다. 그의 실격의 인생을 연주하는 셈이다.
우울한 밤이 지나고 해가 밝았다. 실패의 인간 에드워드는 비비안이 옷차림 때문에 로데오 거리 옷 매장에서 홀대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는 발끈하여 홀대한 매장 근처 다른 매장에서 크레디트 카드로 엄청나게 많은 옷과 구두와 모자를 비비안에게 사 준다. 그는 로데오 거리 매장이 “사람은 홀대해도, 크레디트 카드는 홀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비비안은 서너 명의 종업원의 서빙을 받으며 패션쇼에 가까운 쇼핑을 한다. 영화 <귀여운 여인>의 명장면 중 하나이다. 어떤 여자라도 부러워할 장면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이 장면이 명장면인 진짜 이유는 에드워드가 물 쓰듯 돈을 쓰기 때문이 아니라, 물 쓰듯 돈을 쓰며 스스로 바보임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사람은 홀대해도, 크레디트 카드는 홀대하지 않는다.” 이는 그가 자기 자신에게도 해야 할 말인 것이다.
http://www.youtube.com/watch?v=SCkCdGqJbQg&feature=player_detailpage
다음 날 에드워드는 자신이 후원하는 자선 폴로 경기장에서 비비안의 신분을 의심하는 필립에게 그녀가 창녀임을 얼떨결에 밝히게 되고 비열한 필립은 비비안을 희롱한다. 에드워드가 비비안의 신분을 필립에게 밝힌 것은, 비비안이 데이비드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질투가 났기 때문이다. 호텔로 돌아온 둘은 이 문제로 다투게 되고, 에드워드는 돈도 받지 않고 떠나려는 비비안에게 진심으로 사과한다.
에드워드는 옹졸해졌다. 비비안의 신분을 함부로 나불대고, 호텔에 들어와 비비안과 다툴 때는, “당신은 창녀고, 나는 당신과 3천 달러로 계약을 했으니, 무조건 계약 기간까지 내 곁에 있어야 한다”고 폭언한다. 그렇다. 이렇게 옹졸해지는 것이다. 질투는 이렇게 사람을 옹졸하게 만든다. 하지만 그래야 사람이다. 냉혈한이 아니라 사람다운 사람은 그런 법이다.
에드워드는 재정난에 부닥친 회사를 헐값에 사서 쪼개 팔아 돈을 버는 전형적인 금융자본가다. 그 과정에서는 정계, 금융계와의 로비도 필수다. 에드워드의 돈벌이는 생산하는 것도, 창조하는 것도 아니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인간적 유대를 팔아야 하는 비정한 인간 에드워드는 깨닫는다. 오직 자신의 몸 하나만을 파는 비비안보다 자신이 더 한심한 창부임을.
개심(改心)의 인간 에드워드는 모스 기업을 인수해 쪼개 팔지 않고, 경영에 참여해 기업을 일으켜 세우는 데 협조하는 쪽으로 마음을 바꾼다. 최초로 그는 생산하게 된 것이다. 그는 기쁘다. 하지만 비비안과의 계약 만기가 왔다. 에드워드는 비비안을 잡으려 하지만, 이제 비비안은 더 이상 돈으로 잡을 수 있는 창녀가 아니다. 비비안은 에드워드를 개심하게 해 주면서, 자신도 개심한 것이다. 에드워드는 비비안을 보낼 수밖에 없다.
에드워드는 새 사람이 되었다. 분명 좋은 일이다. 비비안도 새 사람이 되었다. 또한 좋은 일이다. 하지만 에드워드와 비비안이 새 사람이 되었기 때문에, 그들은 이제 서로를 만날 수 없게 된 것이다. 아, 어찌하리! 사랑은 언제나 떠나가 버린 후 사랑임을 깨닫는 법.
비비안이 에드워드와 작별하고 호텔을 벗어나는 장면에서 스웨덴의 혼성 듀오 록시트(Roxette)의 <사랑이었나 봐요(It must've been love)>가 흐른다. 이 노래가 흐르는 영상을 보라. 비비안은 일급 호텔 팬트하우스에서 구질구질한 자취방으로 돌아가는 현실이 슬픈 것이 아니다. 에드워드도 일주일 동안 즐겁게 지냈던 귀여운 파트너를 잃어서 슬픈 것이 아니다.
http://www.youtube.com/watch?feature=player_detailpage&v=s-XolL_1dN0
-
[인문학] [밑줄쫙-문화] 한(恨) : 한국과 아일랜드2015-04-16
-
[인문학] [밑줄쫙-문학] 내 인생의 겨울 연가 : 플랜더스의 개2015-04-15
-
[인문학] [밑줄쫙-철학] 침묵 : 아기의 침묵과 노인의 침묵2015-04-15
-
[인문학] [밑줄쫙-철학] : 행복의 쓰임 하나 : 언론의 폭력으로부터의 자유 및 관대함2015-04-15
-
[인문학] [밑줄쫙-역사] 역사 : 생물학의 한 조각2015-04-09
-
[인문학] 해방 후 3년 동안의 짧은 역사에 대한 소회2015-04-08
-
[인문학] [많이 나아진 문장 1] 함께읽기의 즐거움 : 신영복 교수의 경어체2015-04-07
-
[인문학] [밑줄쫙-문학] 기록하는 자 : 엄마의 가계부2015-04-06
-
[인문학] 김남일은 시인 신경림의 어린 시절 한 토막을 이렇게 아름다운 언어로 형상화했다.2015-04-06
-
[인문학] 앞에서 소개한 문장이 왜 안 좋은 문장인지 점점 깨닫기 시작하면서,저는 이런 문장을 쓰게 되었습니다. 뭔가 더 나아진 느낌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런 느낌을 받지 못하신다면, 제가 슬플 겁니다.2015-04-04
-
[인문학] 힘들겠지요. 잘 쓴 글을 보면서, 눈을 정화하세요. 그냥 두면 합병증 생깁니다.2015-04-04
-
[인문학] 뭔 소린지 저도 잘 모르겠네요. 지금 보면 어지러워질 뿐이에요. 문법구조가 틀리지 않는 범위에서 최대한 복잡하게 써 보자고 작정한 문장 같네요. 우습네요.2015-04-04
-
[인문학] 왜 안 좋은 글인지 잘 설명해 줘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제가 지금 다시 이 테마로 글을 쓴다면? 죄송하지만, 이 테마로는 글을 쓰지 않을 겁니다. 제 능력을 넘어요.2015-04-04
-
[인문학] 한 15년 전에는, 제가 이런 글을 썼습니다. 지금 보니, 어떻게 이런 글을 썼는지 끔찍하네요. 여러분들은 이렇게 쓰면 안 됩니다. 안 좋은 글을 왜 올리냐고요? 유시민의 을 읽고 나니, 글 공부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아서 올렸습니다. 이렇게 쓰면 안 된다는!2015-04-03
-
[인문학] 베레비는 또 이렇게 말했죠. "인간은 서로 비슷한 사람들과 한패가 되는 게 아니라, 한패가 되고 나서 비슷하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정곡을 찌르는 말 아닌가요?2015-04-01
-
[인문학] 가 보지도 들어 보지도 못한 교회 사진을 이렇게 올리며 갈릴레오의 참회성사를 여러분들께 소개할 수 있는 인터넷이라는 존재가 은혜라면 은혜겠다는 생각이 듭니다.2015-03-27
댓글목록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