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현대철학자들 5] : 사르트르 (3)
본문
가짜 인간인 요원들에게 필요한 것은 정보뿐이다. 인공지능에는 믿음이라는 특이한 인간 능력이 들어설 틈이 없다. 그러나 대원들은 서로를 믿는 믿음, 신뢰감의 토대 위에서 행동을 결정한다. 믿을 수 있기 때문에 또한 배신할 수도 있다. 트리니티는 모피어스를 믿었고 모피어스는 네오를 믿었으며 네오는 선지자 오라클을 믿었다. 믿음은 진짜 인간들만이 가질 수 있는 특징이다.
가짜 인간인 요원들과 달리 진짜 인간인 대원들에겐 사랑, 미움, 질투와 같은 정서가 있다. 영화는 궁극적으로 사랑만이 죽음을 넘어서는 부활의 능력임을 암시한다. 네오는 최후의 탈출지점에서 요원 스미스의 총격으로 사망하지만, 트리니티의 간절한 사랑의 입맞춤으로 다시 살아난다. 그러나 네오의 공격으로 녹아내린 요원을 살릴 길은 없다. 디지털 이미지어서가 아니라 사랑의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http://www.youtube.com/watch?v=LBzWORedm64&feature=player_detailpage
선택, 믿음, 사랑, 진짜 인간의 이 세 가지 특징은 모피어스를 구하러 떠나는 네오의 태도에서 집약적으로 표현된다. 그는 선지자 오라클의 말을 기억한다. “네가 ‘그’인지 아닌지 나도 잘 모르겠다. 그러나 선택해야 할 때가 올 거다. 그 때 선택해라.” 네오는 우선 인간적인 사랑에서 모피어스를 그냥 죽어가게 버려둘 수가 없다고 판단한다. 그래서 목숨을 걸고 그를 구하는 위험한 모험을 선택한다.
그러나 그 모험의 과정에서 그는 자신을 믿기 시작한다. 곧 자신이 ‘그’라는 사실을. 요원 스미스가 네오에게 총탄을 퍼붓기 전에 던진 마지막 인사 “잘 가게,앤더슨”에 대한 네오의 대응 “내 이름은 네오다”는 그 믿음의 증거다. 선지자 오라클의 말처럼 네오는 어쩌면 ‘그’가 아닐 수도 있었다. 그러나 네오는 사랑과 선택과 믿음을 통해서 자신을 ‘그’로 만들어간다.
* 이거 아주 중요하다. ‘그’란 없다. ‘그’가 되려고 하는 자만이 있을 뿐.
http://www.youtube.com/watch?feature=player_detailpage&v=uRpjggCHmPA
가짜 인간은 이미 결판나 버린 존재다. 그러나 진짜 인간은 자신의 특성으로 좀더 완전한 존재로 다가설 수 있다. 이것은 이 영화가 우리에게 주는 감동적인 메시지 중의 하나이다. 이상 진짜 인간, 그래서 위대한 인간인 시온의 대원들, 특히 네오에 대한 이야기를 마친다. 대단히 난해한 영화이긴 하지만, 실상은 ‘위대한 인간’을 믿는 사르트르적 자유와 코드가 맞는 대단히 로맨틱한 드라마다.
진짜 인간은 실존의 인간이다. 여기서 실존의 인간이란 실제로 존재하는 인간이라는 뜻이 아니다. 철학자 사르트르가 말한 맥락대로 “본질에 앞서는 인간”을 말한다. 본질에 앞서다니 무슨 뜻인가? 본질은 이미 확정되어 움직일 수 없는 숙명적인 성질을 말한다. 사르트르는 본질이 먼저 있고 존재가 그것에 맞춰서 만들어지는 존재를 ‘즉자존재’라 불렀다
컴퓨터, 휴대전화, 적외선 감지장치, 인터넷 프로그램, 이런 것들은 모두 즉자존재다. 물론 영화에서 요원들도 즉자존재다. 그들은 본질이 먼저이고 존재는 그 다음이다. 제작자의 머리 안에 먼저 착상된 숙명적인 본질에 따라서 만들어지기 때문에 그것들에게는 자유가 없다. 자유가 없으니 선택할 수 없다. 사르트르식으로 말하면 ‘자유가 선고되지 않은 존재’들인 것이다.
사르트르에 따르면 이와는 전혀 다른 존재가 있다. 본질보다 앞서는 이 존재는 목수나 기술자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저 스스로 자신을 선택하고 만들어가는 존재다. 이 자유의 존재, 선택의 존재를 사르트르는 ‘대자존재’라 불렀다. 물론 이런존재 방식은 오직 인간에게만 가능하다. 이러한 대자존재를 더 익숙한 표현으로 ‘주체성의 존재’라고 말할 수 있다.
네오는 ‘그’로 태어난 것도 아니고 ‘그’로 만들어진 것도 아니었다. 모피어스는 네오를 ‘그’로 믿었지만, 선지자 오라클은 네오가 ‘그’가 아니라고 분명히 말했다. 결국 네오가 ‘그’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네오 자신의 선택과 결단, 믿음과 사랑 때문이었다. 주체적 존재로서 네오가 먼저 있었고, 그는 점차 ‘그’로 변해갔다. 이것이 사르트르가 말하는 실존의 제일 명제, 즉 “존재는 본질에 앞선다”의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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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1
아온님의 댓글
본질은 아직 실현되지 않은 그 무엇이다.
실존하는 나는 본질이 될 수도 있고 안될 수도 있다.
사르트르의 자유가 반복적으로 사용되어 본질에 가까운 실존이 되어 간다.
사르트르의 자유는 우리를 이 행성에 내던진 그 무언가가 부여해 준 고약한 선물이다.
--------------이렇게 해석할 수도 있지만....
본질은 모호한 형이상학적인 존재이고 실존만이 존재한다....라고 해석할 할 수도 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