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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철학] [현대철학자들 8] : 비트겐슈타인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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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겐슈타인에 있어서 언어는 삶의 형식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고 했다. 언어는 그것이 쓰이는 사회의 삶의 형식을 반영하고 있으며, 이에 따라 여러 방식으로 나타난다. 또한 언어는 구체적인 사회적 행위로서 단순히 세계를 그리는 것이라기보다는 세계 속에서 인간들 사이의 의사소통의 수단으로 사용된다. 결국 언어는 인간적, 사회적 맥락과 분리될 수 없다.

 

* <웰컴투동막골>에서, 인간적 맥락이 바뀌면서 북측 군과 남측 군의 언어놀이는 달라진다. 결정적인 계기는 멧돼지 사건이다. 멧돼지로부터의 위험에서 벗어나기 위해 북측 군, 남측 군 할 것 없이 대동단결한 이후 이들의 언어 놀이는 한마디로 이 완전히 바뀌는 것이다. 어쩌면 영화 초반, 폭탄이 터져 눈처럼 쏟아져 내리는 팝콘이, ‘언어놀이의 룰이 바뀔 것을 암시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완전히 다른 언어놀이에서 그들은 더 이상 적대적 대립이라는 룰을 잊어버린다. 북측 군, 남측 군, 미군, 이 삼군(三軍)이 하나가 되어 바비큐 파티를 여는 장면은 이 영화에서 잊을 수 없는 장면이다. 국가와 민족과 인종과 언어와 관계없이 사랑정의배려관용이 언어놀이의 가장 으뜸 룰이 될 수 있음을 느끼게 해 주는 명장면이 아닐 수 없다.

 

언어가 의사소통의 수단일 수 있으려면, 단어들의 정의(Definition)의 일치뿐 아니라, 판단(judgement)의 일치도 요구된다. ‘까치가 어떤 새인지도 알아야 하지만, ‘까치가 길조(吉鳥)라는 판단도 서로 같아야 한다는 말이다. 그래야 앞마당 은행나무에 매달려 있는 까치를 보고, 오늘 하루가 행운을 가져오겠다는 의사소통이 가능하지 않겠는가?

 

판단에 있어서의 일치는 단어 적용 방식의 일치, 궁극적으로는 어떤 것에 반응하고 그것을 바라보는 방식에 있어서의 일치를 말한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판단의 일치가 있어야만 언어는 의사소통의 수단으로서 사용될 수 있다. 정의와 판단이 일치한다는 것은 언어 사용 방식이 일치한다는 것이고, 언어 사용 방식이 일치한다는 것은 동일한 삶의 형식을 지니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삶의 형식은 우리가 능동적으로 취하는 것인가? 아니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인가? 비트겐슈타인은 이 말로 이에 답한다. “규칙을 따를 때 나는 선택하지 않는다. 나는 맹목적으로 규칙을 따른다.” 결국 언어의 존재 근거인 삶의 형식은 궁극적인 주어짐이요, ‘의식적으로 초월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절대적인 한계라 할 수 있다.

 

* 우리는 동일한 삶의 형식을 가지고 있음으로 해서 하나의 언어적 실행에 참여할 수 있으며, 동시에 그러한 언어적 실행은 삶의 형식에 제약받고 있다. 그러므로 삶의 형식은 언어의 궁극적인 근거일 뿐 아니라 또한 언어의 한계이기도 하다.

 

* 물론 이 한계는 극복될 수 없다. 하지만 서로 다른 언어놀이가 조화롭게 공존할 수는 있다. 이는 우리의 무의식 속에 잠재하고 있는 힘, 무의식이 의식에 가할 수 있는 긍정적이고 창조적인 힘을 이용하는 훈련으로써 가능할 것이다. <웰컴투동막골>은 북측 군, 남측 군, 미군, 이 삼군(三軍)이 동막골을 지키기 위해 장렬하게 전사하는 장면으로 끝을 맺고 있다(미군 스미스는 비록 죽지 않지만 죽어야 할 부분은 죽는다). 하지만 죽은 것은 그들의 육신이 아니라 대립갈등이며, 지켜진 것은 동막골이 아니라 인간의 인간에 대한 믿음과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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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온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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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겐슈타인... 존재론의 무덤이라고 할 만하지...철학을 형해화 하여 바보들의 합창을 중단 시킨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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