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밑줄쫙-문학] 인물묘사 : 에라스무스
본문
한스 홀바인. <에라스무스>(16세기경)
에라스무스가 필기대에 서 있다. 그가 혼자라는 것이 우리의 온 신경을 통해 무의식적으로 느껴진다. 그 공간은 고요로 가득하다. 작업하고 있는 이 사람 뒤의 문은 분명히 닫혀 있다. 이 좁은 방 안에 걸어다니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는다. 그러나 주변에서는 무엇인가 일어나고 있는 듯하다. 자기 자신의 내면에 침잠해 있는 이 사람은 창조의 최면 상태에 빠져 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인식하지 못한다.
그는 움직임이 없는 가운데 돌처럼 굳어 있는 듯 보인다. 그러나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 상황은 단순한 정적이 아니라 완벽한 자기 내면으로의 침잠 상태, 비밀 가득한 삶의 상황, 내면에서 완벽하게 완성돼 가는 삶의 상황이다. 그리곤 긴장된 집중 속에서 푸르게 빛나는 눈은, 가늘고 연약해서 거의 여자 손 같은 그의 오른손이 저 위에서 내려오는 명령에 따라 쓰고 있는 하얀 종이 위의 글자들을 따라간다. 입은 굳게 닫혀 있고 이마는 고요하고 차갑게 빛난다. 펜은 고요한 종이 위에 루네 문자를 힘 안 들이고 기계적으로 옮기고 있는 듯 보인다. 그러나 양눈썹 사이에 약간 튀어나온 근육은, 이 보이지 않고 거의 감지할 수 없는 정신노동의 고통을 드러낸다. 뇌의 창조 영역 가까이에서 경련하고 있는 그 작은 주름은 바른 표현을 찾기 위한, 올바르게 옮겨야 하는 단어를 찾기 위한 고통스러운 싸움을 거의 무형의 상태로 예감하게 해 준다.
이로써 생각은 바로 몸의 형태를 갖추어 드러나고, 이 인간의 주위에 있는 모든 것은 진동으로 전달된 이 침묵의 비밀스러운 흐름이 일으킨 긴장 상태임을 파악하게 된다. 이러한 표현 속에서 보통 때 같으면 엿볼 수 없는 전환의 순간, 정신적 질료가 어떤 형태와 글로 변하는 힘의 화학적 전환이 나타나는 것이다. 우리는 이 그림을 몇 시간이고 들여다 볼 수 있고 그 고요의 진동 소리를 엿들을 수 있다. 홀바인은 '일하고 있는 에라스무스'라는 상징으로 모든 정신 노동자의 성스러운 진지함과 모든 진정한 예술가의 보이지 않는 인내를 영원화했다.
-- 슈테판 츠바이크. 《에라스무스》. 아롬미디어. 2006. 72-7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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