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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철학] 아우구스티누스 (Augustine)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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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티누스는 작은 아우구스투스라는 뜻이고 아우구스투스는 카이사르의 후계자이자 로마의 초대 황제라고 인정 받는 바로 그 사람이므로 아우구스티누스는 지극히 로마적인 이름이었다.

그러나 그는 퇴락해 가는 로마의 정신이나 이상에는 별 관심이 없었고 어떤 면에서는 반로마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기독교에 헌신하였다.

당시 시대의 조류가 그러했을 것이다.

어찌되었건 이러한 선택 덕분에 그는 이름에 부끄럽지 않을 만한 업적을 남길 수 있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현재 북아프리카 알제리 지역인 타가스테라는 소도시에서 태어났는데,

이 도시의 관리이며 이교도였던 아버지는 매우 바빴는지 기독교도인 어머니가 어린 시절 그의 교육을 전담하였다 한다.

그러나 어머니의 지적 수준이 영리한 어린 아들을 만족시킬 정도는 아니었는지 이 당시에는 기독교에서 별 다른 감명을 받지 못했다 한다.

아들에게 정치적인 이름을 부여할 정도로 현실적이었던​ 아버지는  사춘기의 정점에 도달한​ 아들을 카르타고의 대학으로 유학 보내었는데,

이는 당시 잘 나가던 수사학을 배워 입신양명하라는 전혀 기독교적이지 않은 의도였다.

그런데 대도시란 자고로 자극적인 것들로 넘쳐나는 곳이고 사춘기는 감수성이 가장 예민한 시기이니,

한적한 소도시에서​ 어머니의 보살핌을 받으며 살다가

고등학교에 입학할 나이인 17세에 갑자기 복잡한 대도시로 생활의 근거를 옮기게 된 소년에게 아무 일이 없었다면 그게 더 이상했을 것이다.

화려한 도시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마음껏 청춘을 즐겼고 급기야는 3년 만에 한 처녀와 동거에 들어갔는데...

이런 꼴을 그냥 두고 볼 부모는 세상에 없을 것이다.

아들을 유학 보낸 지 1년 만에 남편이 사망하여 오매불망 아들이 출세하여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던 기독교도 어머니는 하도 기가막혀 모자의 연을 끊는 초강수를 두며 펄펄 뛰었으나. 

이미 쾌락을 알아버린 젊은이에게 어머니의 눈물은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하였고.

그는 계속 동거생활을 이어 가는 한편 기독교는 미신이라 치부하고 선악 이분법을 사용하는 나름 논리적인 마니교에 투신하였다 한다.

자식이 아니라 웬수였을 것이다.

여기까지만 보면 철없는 부잣집 도련님의 방탕한 유학생활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그것만은 아니었는지 이 머리 좋은 청년은 이미 키케로 철학의 정수를 받아들여 삶의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탐구를 시작한 상태였으며 

공부도 열심히 하였다 한다.

 

이 시절 그는 악에 대해 민감하여 선의 본질, 악의 근원 등과 같은 골 때리는 주제들과 씨름을 하였다 하는데

이는 동서양을 막론하는 참으로 유서 깊고 생명력이 질긴 철학 상의 난제로서 이 문제를 풀기 위해 전전긍긍하는 젊은이들이 지금도 많고, 앞으로도 많을 것이다.

어머니의 지원도 끊긴 상태에서 처자식 먹여 살리랴 공부하랴 바빴을 아우구스티누스는, 

`이교든 기독교든 신이 세상을 창조했다고 주장하는데 선으로 똘똘 뭉친 신이 만들어 낸 이 세상은 왜 이리 개판인가` 하는 풀리지 않는 화두를 언제까지나 물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에,

선악 이분법을 사용하여 나름대로 논리적인 답을 주는 마니교의 열열한 신자가 되었고,

우여곡절이 많았겠지만 마니교도들의 도움과 좋은 머리 덕에 공부를 무사히 마치고 금의 환향하여 고향에 수사학을 가르치는 학교를 세울 수 있었다.

그러나 세상 경험 부족한 젊은이의 첫 사업은 쉽지 않았을 것이고, 결국 얼마 안되어 접을 수밖에 없었다 한다.

별 수 없이 카르타고로 귀환하여 수사학을 가르치며 생활하던 아우구스티누스는

그동안 물심양면으로 도와주던 마니교도들과의 관계도 예전만 못하였는지  다시 실존적 고뇌에 빠져들었고, 

결국 10년 가까운 마니교도의 생활을 청산하며 신플라톤주의자가 되었다 한다.

신플라톤주의는 궁극의 실체이자 만물의 존재원리로서 플라톤의 이데아가 압축된​ 꼴인 일자을 주장하는데,  

이 일자는 유일신과 쉽게 대치가 가능하였다.

따라서 당시 변변한 철학이 없던 기독교는 이를 차용하여 교리를 설명하는데 열심히 써먹고 있는 중 이었으므로

기존 가치의 부정을 통해 정체성을 확립해 가던 당시 기독교들에게 신플라톤주의는 다른 철학에 비해 상대적으로 친화력이 높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러한 신플라톤주의 철학의 특성 덕분에 아우구스티누스의 기독교 입성까지는 이제 한 걸음 남은 셈이 되었다. 

 

마니교와 결별하며 수사학에 철학까지 겸비하게 된 아우구스티누스는 카르타고를 떠나 아우구스투스의 도시 로마에서 그의 운명을 시험하였는데,

학생들이 수업료를 제대로 내지 않아 또 한 번 망하였였다 한다.

이에 실망한 그는 당시 서방 최대의 성세를 자랑하던 밀라노로 이주하였고

배운 도둑질이 그것 밖에 없어서인지 애들에게 수사학과 철학을 가르치며 생활한 모양인데,

당시 밀라노에는 황제를 무릎 꿇린 것으로 유명한 교부 암브로시우스가 주교로 있었다.

누군가를 가르친다는 유사 직종에 종사하던 아우구스티누스는 암브로시우스의 성공을 벤치마킹하기 위해 열심히 설교를 들으러 다녔는데,

처음의 의도와는 달리 가랑비에 옷 젖는 것처럼 암브로시우스의 강론의 주제인 기독교 사상이 그의 내면을 흔들어 놓았다.

마음의 안식을 찾지 못하던 그는 어느날 갑자기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하는데,

바울처럼 길거리에서 직접 이름이 불린 것은 아니고 웬 애가 뭔가를 읽으라는 명령이었다 한다.

그는 명령대로 책을 읽었는데 그 책이 로마서였고 펼쳐진 장에는 마치 그의 젊은 날을 질책하는 듯한 내용이 씌어져 있었다 한다.

이에 크게 깨달음을 얻은 그는 바로 암브로시우스에게 세례를 받고 열렬한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 하는데

이때 그의 나이가 32세였다.

아우구스투스는 마음의 안식을 얻고 그의 어머니는 만세를 불렀겠지만,

10대에 만나 애 낳고 살면서 거듭된 사업실패를 비롯한 그 간의 인생 유전을 함께 겪으며 15년을 동고동락했던 그의 아내는

졸지에 정욕과 방탕의 상징이 되어 버렸다.

금욕과 자발적 고행을 주사상으로 내세우는 당시 기독교의 열렬한 추종자가 된 아우구스티누스는 아내를 소 닭 보듯이 대했을 것이고.

영문도 모르고 사탄의 주구 내지 악의 근원이 되어 버린 아직 젊은 그의 아내는 그러한 대접을 견디기 힘들었는지 새 인생을 찾아 떠났다 한다.

이제 막 사춘기에 접어들었던 그의 아들의 반응이 어떠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아마도 그리 우호적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우구스티누스는 이제 기독교인으로서 새로운 인생을 살기 위하여,

세상 대부분의 어머니들처럼 절교 선언 이후에도 끊임없이 아들의 인생에 개입했던 늙은 어머니와 부모의 이혼으로 괴로워했을 사춘기 아들을 데리고 아프리카로 돌아가게 되었는데​,

아들의 개종으로 성령이 충만했을 어머니는 체력이 따라주지 않았는지 여행 도중 사망하였고

아버지와 동행해서 수도회에 참여했던 아들은 풍토가 안 맞았는지 아니면 심화를 이기지 못하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17살의 어린 나이로 사망하고 말았다.

어머니와 하나밖에 없는 아들의 잇따른 죽음이 얼마나 그를 슬프게했는 지는 알 수 없으나 

어찌 되었건 속세의 인연이 모두 정리되어 홀가분해진 그는 수도회의 운영에 전력을 다하였고 날로 번창하였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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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5-11 07:3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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