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가을까지 온 것들: 도종환
2013-11-13 09:51
14,293
1
0
본문
구절초 꽃의 보랏빛 향기 속에 몸을 담그고 있던 잠자리가 대추나무 가지로 옮겨 앉습니다. 가느다란 다리로 나뭇가지를 잡으며 대추나무에게 무슨 말인가를 중얼거리는 잠자리 날개의 미세한 잎맥 위로 바람이 지나갑니다. 네 개의 날개 끝에 있는 단아한 고동색 무늬가 곱습니다. 잠자리 몸의 아름다운 색깔들은 누가 칠해놓았는지 참 잘도 그리셨다는 생각을 합니다. 저 작은 한 마리의 잠자리도 기나긴 장맛비의 회초리를 다 견뎌냈습니다. 뜨거운 햇살의 시간도 다 지나 여기까지 왔습니다. 귀뚜라미 몇 마리가 언제 숨어들어 왔는지 욕실 구석에 살림을 차린 뒤 몰래 새끼를 낳아 키우고 있습니다. 가늘고 긴 더듬이를 뻗어 소리를 내 보낼 방향을 가늠하더니 저녁이면 숲으로 긴 편지를 찍어 보내느라 골똘합니다. 귀뚜라미 가족도 천둥과 번개의 시절을 다 지나왔습니다. 그 크고 두려운 소리가 들릴 때마다 어린 새끼들을 보듬어 안고 얼마나 두려움에 떨었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마당가의 물봉선, 원추리, 배롱나무, 청죽, 질경이도 쏟아지는 빗줄기를 다 이겨냈습니다. 번개가 날카로운 칼날로 팽나무 가지 끝에서 뿌리까지 훑고 지나갈 때, 흰색 보라색 도라지꽃들도 꽃부터 뿌리까지 찢어질 듯 뜨거운 불칼을 맞으며 견뎌냈습니다. 모든 나무와 풀들이 뿌리로 땅을 움켜잡고 질렀던 소리 없는 비명을 가을바람은 알고 있습니다. 뿌리가 견딜 때 열매들도 똑같이 견뎠습니다. 대추나무의 작은 대추알들도 폭풍을 이겨냈습니다. 대추나무 가지와 대추알을 연결하는 꼭지는 가늘고 짧고 작습니다. 폭풍이 온몸을 흔들어 댈 때마다 대추알을 지키느라 꼭지는 얼마나 마음을 졸였겠습니까? 대추보다 몸이 큰 푸른 감과 둥근 사과와 배는 제가 키워온 제 무게 때문에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그 시간을 지나 지금 부드러운 바람에 몸을 맡기고 있는 꽃과 나무와 곤충들이 대견합니다. 한 알의 과일은 그냥 저절로 자란 과일이 아닙니다. 참으로 많은 것들을 견디고 이겨내 지금 완성을 향해 과육을 다지고 있는 것입니다. 한 송이 가을 꽃은 그냥 꽃이 아닙니다. 청초한 빛깔은 그냥 만들어 진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폭풍과 장맛비와 폭염 속에서 올린 절절한 기도가 우리가 마시는 맑은 공기 속에 신선하고 뜨거운 기운으로 스며들어 있는 것입니다. |
0
로그인 후 추천 또는 비추천하실 수 있습니다.
-
[마루밑다락방의 서고] 초승에 뜨는 달은 ‘초승달’이 옳다. 물론 이 단어는 ‘초생(初生)’과 ‘달’이 합성한 경우이나, 어원에서 멀어져 굳어진 경우 관용에 따라 쓴다는 원칙에 따라, ‘초승달’이 올바른 표현이다. 마치 ‘폐렴(肺炎), 가난(艱難)’ 등과도 같은 경우이다.2015-05-25
-
[인문학] 아일랜드... 예이츠의 고향. 가장 늦게 도달한 기독교(카톨릭)에 가장 심취하였고 중세 수도원 운동이 크게 부흥하여 역으로 대륙에까지 영향을 미쳤던 곳... 중국보다 성리학에 더 미쳤던 한국..자본주의의 실험재료가 되어, 자국의 식량이 부족하여 백성은 굶어죽는데도 영국으로 식량을 수출해야 했던 나라. 맬더스 인구론의 근거가 됐었고.. 영국의 식민지였으며 분단의 아픔을 격고 있는 나라.. 참 한국과 비슷한 점이 많은 나라입니다.2015-04-16
-
[인문학] 러셀... 현대의 소크라테스...2015-04-15
-
[인문학] 비극적이고 치명적인 대가를 치른 후였다.-------------전이겠지요.2015-04-09
-
[인문학] 신영복 교수... 진정 겸손한 글을 쓰는 분이지요.소외 당한 자, 시대의 약자들에 대한 이해가 깊은 분이고. 그들을 대변 또는 위로할 수 있는 몇 안되는 작가들 중의 하나이지요.2015-04-08
-
[인문학] 좋군요....2015-04-07
-
[인문학] 과학이 본연의 임무대로 오류들을 이리저리 쳐내가다 보니 알맹이가 하나도 안 남은 형국이되었습니다. 그러니 과학 때문에 목적을 상실했다는 말이 나왔고, 도구에 불과한 과학이 미움을 받는 묘한 지경이 되었습니다만... 그게 과학의 잘못은 아니지요. 만들어진 요리가 맛이 없는게 잘드는 칼의 잘못입니까? 재료가 형편없었던 까닭이지요.2015-04-05
-
[인문학] 물론 ‘목적 없는 세계’라는 아이디어가 ‘신앙의 부재’와 반드시 일치할 필요는 없겠지만, 어떤 목적으로 움직이는지 회의를 주는 세계는 신앙심을 약화시키는 무신론을 철저히 방조하고 있음엔 틀림없는 것 같다. -------------음... 아직 옛날 습관이 남아있는 어투이군요...전지전능의 무한자는 인간이 알 수 있는 대상이 아닙니다. 즉 불가지의 존재이지요. 이 불가지의 존재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있는지도 당연히 불가지입니다. 과학은 이 불가지의 세계를 다루지 않습니다. 그랫다가는 오컴에게 면도날로 난도질 당합니다. ㅋㅋㅋ2015-04-05
댓글목록1
마루밑다락방님의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