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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온의 서고

[시] 가을까지 온 것들: 도종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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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절초 꽃의 보랏빛 향기 속에 몸을 담그고 있던 잠자리가
대추나무 가지로 옮겨 앉습니다.

가느다란 다리로 나뭇가지를 잡으며 대추나무에게 무슨 말인가를
중얼거리는 잠자리 날개의 미세한 잎맥 위로 바람이 지나갑니다.

네 개의 날개 끝에 있는 단아한 고동색 무늬가 곱습니다.
잠자리 몸의 아름다운 색깔들은 누가 칠해놓았는지
참 잘도 그리셨다는 생각을 합니다.

저 작은 한 마리의 잠자리도 기나긴 장맛비의 회초리를 다 견뎌냈습니다.
뜨거운 햇살의 시간도 다 지나 여기까지 왔습니다.

귀뚜라미 몇 마리가 언제 숨어들어 왔는지 욕실 구석에 살림을 차린 뒤
몰래 새끼를 낳아 키우고 있습니다.
가늘고 긴 더듬이를 뻗어 소리를 내 보낼 방향을 가늠하더니
저녁이면 숲으로 긴 편지를 찍어 보내느라 골똘합니다.

귀뚜라미 가족도 천둥과 번개의 시절을 다 지나왔습니다.
그 크고 두려운 소리가 들릴 때마다 어린 새끼들을 보듬어 안고
얼마나 두려움에 떨었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마당가의 물봉선, 원추리, 배롱나무, 청죽, 질경이도 쏟아지는
빗줄기를 다 이겨냈습니다.
번개가 날카로운 칼날로 팽나무 가지 끝에서 뿌리까지 훑고 지나갈 때,
흰색 보라색 도라지꽃들도 꽃부터 뿌리까지 찢어질 듯
뜨거운 불칼을 맞으며 견뎌냈습니다.
모든 나무와 풀들이 뿌리로 땅을 움켜잡고 질렀던 소리 없는 비명을
가을바람은 알고 있습니다.

뿌리가 견딜 때 열매들도 똑같이 견뎠습니다.
대추나무의 작은 대추알들도 폭풍을 이겨냈습니다.
대추나무 가지와 대추알을 연결하는 꼭지는 가늘고 짧고 작습니다.

폭풍이 온몸을 흔들어 댈 때마다 대추알을 지키느라
꼭지는 얼마나 마음을 졸였겠습니까?

대추보다 몸이 큰 푸른 감과 둥근 사과와 배는 제가 키워온
제 무게 때문에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그 시간을 지나 지금 부드러운 바람에 몸을 맡기고 있는
꽃과 나무와 곤충들이 대견합니다.

한 알의 과일은 그냥 저절로 자란 과일이 아닙니다.
참으로 많은 것들을 견디고 이겨내 지금 완성을 향해
과육을 다지고 있는 것입니다.

한 송이 가을 꽃은 그냥 꽃이 아닙니다.
청초한 빛깔은 그냥 만들어 진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폭풍과 장맛비와 폭염 속에서 올린 절절한 기도가
우리가 마시는 맑은 공기 속에 신선하고 뜨거운 기운으로
스며들어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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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5-11 07:3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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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1

마루밑다락방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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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종환 시인의 시는 이런 스타일이 많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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