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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온의 서고

[역사를 바꾼 인물 또는 사건] 나폴레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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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중해 코르시카섬 아작시오에서 출생했다. 
그의 이름인 나폴레옹 보나파르트(Napol?on Bonaparte)는 부모가 지어준 나폴레오네 부오나파르테란 본명을 이후에 프랑스 식으로 바꾼 것이다.
프랑스혁명의 사회적 격동기 후의 안정에 편승하여, 제1제정을 건설하였다.
군사·정치적 천재로서 세계사상 알렉산드로스대왕·카이사르와 비견된다.
아버지가 지도자 파올리를 따라 프랑스에 대한 코르시카 독립운동에 가담하나,
싸움에 진 뒤에는 도리어 프랑스 총독에게 접근하여 귀족의 대우를 받았다.
1779년 아버지를 따라 프랑스에 건너가, 10세 때 브리엔 유년학교에 입학하여 5년간 기숙사 생활을 하였다.
코르시카 방언으로 프랑스어 회화에 고민하며 혼자 도서실에서 역사책을 읽는 재미로 지냈으나,
수학만은 뛰어난 성적을 보였다.
1784년 파리육군사관학교에 입학, 임관 뒤 포병소위로 지방연대에 부임하였다.
1789년 프랑스혁명 때 코르시카로 귀향하여, 파올리 아래서 코르시카국민군 부사령에 취임하였다. 프랑스 육군은 3회에 걸친 군대이탈과 2중군적에 대해 휴직을 명하였다.
1792년 파올리와 결별하고, 일가와 함께 프랑스로 이주하였다.
1793년 가을 툴롱항구 왕당파반란을 토벌하는 여단 부관으로 복귀하여, 최초의 무훈을 세웠다.
 F.로베스피에르의 아우와 지우(知遇)를 갖게 되어 이탈리아 국경군의 지휘를 맡았다.
테르미도르(Thermidor)의 반동 쿠데타로 로베스피에르파(派)로 몰려 체포되어 다시 실각, 1년간 허송세월을 보냈다.
1795년 10월 5일(방데미에르 13일), 파리에 반란이 일어나 국민공회(國民公會)가 위기에 직면하자, 바라스로부터 구원을 요청받고, 포격으로 폭도들을 물리쳤다.
이 기민한 조치로 재기의 기회를 포착, 1796년 3월 바라스의 정부(情婦)이자 사교계의 꽃이던 조제핀과 결혼, 총재정부로부터 이탈리아 원정군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이탈리아에서 오스트리아군을 격파하여 5월에 밀라노에 입성, 1797년 2월에는 만토바를 점령하는 전과를 올렸다.
10월 오스트리아와 캄포포르미오(Campoformio)조약을 체결하여, 이탈리아 각지에 프랑스혁명의 이상을 도입한 인민공화국을 건설하였다.
그의 명성은 프랑스에서도 한층 높아졌다. 하루 3시간만 잔다는 소문도 있었으나, 비서 브리센에 의하면 건강에 항상 신경을 써서 하루 8시간은 잤다고 한다.
1798년 5월 5만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이집트를 원정하여 결국 카이로에 입성하였다.
7월 해군이 아부키르만(灣)에서 영국함대에 패하여 본국과의 연락이 끊기자 혼자서 이집트를 탈출, 10월에 프랑스로 귀국하였다. 곧 그를 통해 총재정부를 타도하려는 셰이에스 ·탈레랑 등의 음모에 말려들었다.
1799년 11월 9일(브뤼메르 18일) 군을 동원, 500인회를 해산시켜 원로원으로부터 제1통령으로 임명되고, 군사독재를 시작하였다.

그는 평생 코르시카인의 거칠음·솔직함을 잃지 않아, 농민출신 사병들로부터 신뢰를 받고 있었으나, 역사적 영웅으로 보면 인간성을 무시하고 도덕성이 결여된 행동의 주인공이었다.
광대한 구상력, 끝없는 현실파악의 지적 능력, 감상성 없는 행동력은 마치 마력적이라고 할 정도였다.
이처럼 사상 유례 없는 개성이 혁명 후의 안정을 지향하는 과도기의 사회상황에서 보나파르티즘이라는 나폴레옹의 정치방식이 확립되었다.
제1통령으로서 국정정비 ·법전편찬에 임하고, 대(對)오스트리아와의 결전을 서둘러 1800년 알프스를 넘어 마렝고에서 전승을 이룩하였다.
1802년에는 영국과 아미앵화약을 맺고, 1804년 12월 인민투표로 황제에 즉위하여 제1제정을 폈다. 즉위소식을 들은 L.베토벤이 《영웅 교향곡》의 악보에서 펜을 던지고, ‘인민의 주권자도 역시 속물이었다’고 한탄하였다고 한다.
 영국을 최대의 적으로 간주하던 그는 즉위하자, 곧 상륙작전을 계획하였다.
 1805년 가을 프랑스함대는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H.넬슨의 영국해군에 다시 격파되어, 그의 웅도(雄圖)는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같은 해 12월 아우스터리츠전투에서 오스트리아 ·러시아군을 꺾은 이래, 프랑스육군은 전유럽을 제압하여 위광을 전세계에 떨쳤다.
1809년 조제핀과 이혼, 이듬해 오스트리아 황녀 마리 루이즈와 재혼하였다.
그러나 1812년 러시아원정에 실패하면서 운세도 기울어져, 1814년 3월 영국 ·러시아 ·프러시아 ·오스트리아군에 의해 파리를 점령당하고, 그는 엘바섬으로 유배되었다.
이듬해 1815년 3월 다시 파리로 들어가 황제에 즉위하였으나,
6월 워털루전투에서 패하여 영국에 항복하였다.
그 뒤 대서양의 세인트 헬레나섬에 유배, 그곳에서 죽었다. 그
가 구술하는 회상록을, 동행하던 옛 부하 E.라스카스가 기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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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5-11 07:3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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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1

마루밑다락방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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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 나폴레옹.. 결국 유배가나 황제로 즉위했으나 다시 유배되어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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