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레옹의 전술 > 아온의 서고

본문 바로가기

아온의 서고

[역사를 바꾼 인물 또는 사건] 나폴레옹의 전술

본문

18C 중반과 후반, 일군(一群)의 프랑스군 장교들에 의해 군사에 있어서 혁신적인 개념이 태동 하게 되었다.
부르세, 기베르, 그리보발과 듀테일 등이 그들이다.

부르세는 부대를 몇 개의 종대로 나누어서, 여러 개의 통로를 이용하여 공동 목표로 진군시키는
이른바 "분진협동공격"의 개념을 발전시켰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징기스칸이 호리즘 제국을 침공했을 때와 수베데이가 5백여년 전 헝가리를 공격할 때 사용 한 것과 근본적으로 같은 것이었다.
부르세는 적이 모든 곳에 힘을 모아 대비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에
병력을 분리 운용함으로서, 실제 목표가 아닌 다른 곳에 주공격이 이루어질 것 으로 믿게 하여 적을 현혹시킬 수 있다고 가르쳤다.
따라서 이러한 전략은 적이 당초의 계획을 포기하고 새로운 위협에 맞서기 위해 부대를 분산시키거나
2차 적인 목표를 약하게 버려둔 채 주요지점을 집중방어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 것 이고,
이 때 서로 지원가능한 거리에 있는 두 개 혹은 몇 개의 종대가 신속히 결합해서
적이 부대를 분산함으로써 약해진 목표를 압도할 수 있다면
그 지휘관은 최소한 한 가지 혹은 그 이상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기베르는 군대를 상설적인 사단으로 편성함으로써, 각 사단이 각각의 분리된 경로를 따라 독립적인 작전을 수행할 수 있는 더욱 기동성 있는 전투형태를 만들기를 원했다.
가능한한 넓게 분산하면 할수록 적을 더욱 혼란시킬 수 있고, 지휘관이 보다 좋은 기회를 포착하여 공격할 수 있다.
또한 민간 도급업자가 후방의 식량창고로부터 작전중인 부대로 식량을 추진 보급하는 보편적인 관례를 없애는 데도 도움을 줄 것이다.
기베르는 군 장교가 군수관계를 배우기를 원했고, 적지에서 적의 비용으로 아군을 유지할 것을 강조 했다.
군대의 급식에 관한 그의 생각은 프랑스 혁명으로 나타난 새로운 형태의 병사를 필요로 했다.
즉, 양식을 찾아 다녀야 해도  탈영을 하지 않는, 믿을 수 있는 지원병과 애국적인 병사들이 필요했던 것이다.
1796∼97년의 이탈리아 침공작전에서 나폴레옹은 사단 체계를 채용했다.
그는 후에 이러한 개념을 확장하여 "방진대대(batealion square, battalion carre)" 혹은 몇 개의 사단으로 편성된 군단을 만듦으로서
모든 부대는 어떠한 적군에 대해서도 하루나 이틀은 단독으로 지탱할 수 있고, 이로써 다른 종대가 여러 방향으로 동시에 적에게 다가갈 수 있게 하였다.
기베르는 적 정면의 어느 한 부분을 파괴하여 결정적인 돌파작전을 수행 할 수 있는 틈을 만들기 위해 신속한 화력집중이 가능하도록 포병의 기동력을 증가시키려고 노력했다.
또한 그가 구상한 새로운 형태의 사단은 적이 구축한 모든 방어진지에 대해 우회하거나 측면공격을 가할 것을 권했다.
이것은 정적인 방어작전의 종말을 고하고 전쟁을 더욱 유동적인 것으로 변화시키는 것이었다.

그리보발은 야포의 기동력을 증가시키기 위해 포의 무게를 과감하게 감소시킬 것을 제안했고,
듀테일은 그리보발의 이러한 개념과 기베르의 생각을 기초로 하여 피지원부대에 떨어지지 않도록 말이 끄는 가벼운 활강포를 사용했다.
이로써 적의 가장 약한 곳에 최고의 부대와 최고의 포를 결합 수 있었다.
프랑스 혁명 중에는 가볍고, 더욱 기동력 있는 포병과 상설사단이 프랑스군에 창설되었다.
기베르와 부르세가 주장한 분진협동공격과 이동의 개념을 실전에 적용한 이가 바로 나폴레옹이다.

나폴레옹이 항상 따르려고 노력했던 원칙은
" 전략의 본질은 비록 적보다 약한 군대를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공격할 때나 적으로부터 공격 받는 곳에는 항상 적보다 더 많은 병력을 유지하는데 있다."라는 것이었다.
나폴레옹은 상대방을 속이고 상대의 취약점을 노출시키기 위해 각기 다른 전선을 따라 여러 지점으로 몇 개의 종대를 진군시킨다는 부르세의 가르침을 적용했다.
부르세의 분진협동공격계획을 적용을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나폴레옹의 이탈리아 전쟁중에 오스트리아와 피에드몬트군과 전투가 벌어졌는데
피에드몬트 평야를 장악한 그는 그의 군대를 3개의 종대로 나뉘어
서로 하루 행군 거리만큼 떨어져서 행군했다.
 이것은 마치 촉수를 흔들며 자기 주위에 있는 어떤 상대도 움켜쥘 수 있고 그 사이 다른 촉수가 그것에 접근하는 낙지 같이
일련의 독립적인 종대가 공동의 목표를 향해 전진하는 것이었다.
이것에 대해서 상대방은 어느 쪽이든지 진로에 중요한 목표가 있기 때문에
병력을 분산 시키거나 아니면 그 중 어떤 것을 포기해야만 했다.
결국 이런 식으로 하여 나폴 레옹은 피에드몬트의 수도인 투린을 위협하게 되었고
피에트몬트군을 전열에서 이탈하게 만들어 오스트리아군의 세력을 단숨에 열세로 만들었다.
- 이런 기동 의 예는 미국의 남북전쟁 당시 셔만장군이 즐겨 썼던 것이다.
그는 남부의 후방 깊숙히 들어가 부대의 진로를 어중간하게 위치하여
남군의 병력의 분산을 노렸 고 남군은 부족한 병력을 쪼개어 중요 지점을 방어하려고 했으나
셔만은 약한 남군을 격파하여 결국 남북전쟁의 승리를 이끌어 냈던 것이다.
또 이외에도 나폴레옹이 즐겨 썼던 것이 "적 배후로의 기동"이다. - 이것은 리델하트의 전략론에 주로 언급되는 것이다.
이 적 배후로의 기동이야말로 전략 의 원칙이라는 것인데
제2차세계대전시 독일군의 장성들이 이 개념을 도입하여 유명해졌다.- 그는 보통 이러한 배후기동으로 수십 마일의 넓은 전선에 걸쳐 사용했다.
그 개념은 우선 적 정면에 부대를 투입하여 맹렬한 공격과 위협으로 적군을 주전선에 고착시키고, 동시에 강력한 종대를 적의 측면을 돌아 배후로 들어가게 하여 적의 병참선과 철수로를 가로지르는 전략적 장애물이나 장막을 구축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적은 그의 주력전선에서 철수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며, 만약  적시적소에서 적을 차단한다면 적을 일거에 패배시키거나 분쇄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기동은 나폴레옹이 사용한 가장 치명적인 전략적 방해이었다.
그의 군시절을 통하여 나폴레옹은 정면공격을 하지 않을 수 있을 때는 결코 정면공격을 하지 않았으며 항상 적의 배후로 기동하여 적의 퇴로를 차단하려고 노력했다.
나폴레옹은 만약 이러한 기동이 실패한다 하더라도, 적의 사기를 흔들리게 하고 그에게 공격의 기회를 제공해 줄 수도 있는 적의 실수를 유발시킬수 있다고 생각했다
나폴레옹의 이와 같은 배후로의 기동전략은 1800년 이탈리아에서의 마랭고 전투와 1805년 오스테리츠 전투의 시작 단계에서부터 나폴레옹에게 승리를 안겨 주었다.
그리고 그가 가장 즐겨 썼고 승리를 얻기 위해 수없이 사용했던 전술이 있는 데
그것은 일련의 기만적인 기동과 한 공격지점에 포병을 집중시키는 듀테일(du Teil)의 개념을 결합한 것이었다.
이 전술의 첫번째 단계는 우선 적의 주전선에 강력한 부대를 투입하여 맹렬하고 강력한 공격을 가함으로서 나폴레옹이 이곳을 돌파하려 한다고 확신한 적이
이를 막기 위해 모든 예비병력을 투입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것이었다.
그 다음으로 나폴레옹은 적의 병참선과 철수로를 위협하기 위해 적의 배후로 강력한 측면부대를 보낸다.
이것은 이미 모든 예비병력을 전선에 투입했을 적 지휘관으로 하여금 측면으로 기동하는 부대에 대처하기 위해 부득이 주전선에서 일부 병력을 전용(轉用)하지 않을 수 없게 했다.
서둘러야 했기 때문에 이들 병력은 대체로 프랑스군의 측면 기동부대로부터 가장 가까운 지점에서 차출되었다.
따라서 나폴레옹은 적 전선의 어디가 취약해질 것인지를 미리 예상할 수 있었다.
이에 따라 나폴레옹은 이에 대한 준비로 이 지점의 맞은 편, 즉 그가 돌파하고자 하는 주전선의 후방에
믿음직스러운 부하 의 지휘하에 기병, 보병, 포병으로 구성된 "강력한 집중공격부대"를 숨겨 놓았 다.
적이 측면공격에 대처하기 위해 부대를 전용함으로서 전선이 엷어지는 것을 간파하면,
나폴레옹은 이들 특수부대의 대포로 집중적인 포격을 가하여 이미 엷어진 지점에 돌파구를 만들었다.
전 전선에 걸쳐서 강력한 공격을 계속하는 동안 집중공격부대의 보병은 적의 전열이 깨진 곳으로 돌격해 들어가 그들을 분쇄하며 돌파구를 확장하고, 이 틈을 통해 기병들이 곧바로 질주해 들어갔다. 이러한 돌파는 적의 균형을 일거에 무너뜨렸고, 기병은 이들 와해된 부대를 과감하게 추격하였다.
이에 더하여 한가지 특기할 만한 것은 당시의 프랑스군의 보도(步度) -걸음 속도- 에 관한 것이다. 당시 프랑스군에 대항하는 적군의 전진이나 전투에 임한 보도는 종전과 같은 1분에 70보인데 비하여 프랑스군의 보도는 1분에 120보로 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기계과학이 사람의 다리보다 빠른 운동수단을 부여하기 전인 이 시대에 있어서 이 기본적인 차이는 타격력의 빠른 이동과 집중 전환이 가능하였다.
그에 따라 프랑스는 특히 나폴레옹 시대에 있어, 전략적 으로나 전술적으로나 "속도에 의해 질량을 갑절로" 할 수 있게 되었다.
당시의 보병의 소총의 위력은 그리 뛰어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보병이 집단대형을 이루어 화망을 구성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었다.
이러한 보병의 진영이 무너짐 으로해서 전투의 승부가 결정나는 것이었다.
바로 이것을 염두에 두어야 당시 보병의 속도의 중요성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진영의 속도가 빠름과 그 운용방법이 이 시대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었고,
나폴레옹은 이 진영을 교묘히 운용 하여 적에세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은 타격을 입혀 승리했던 것이다.
그리고 나폴레옹의 천재성을 가장 잘 나타내주는 것은 바로 "내선위치 전략" 이다.
즉 서로 지원가능한 거리에 있는 둘 이상의 적 부대 사이로 기동하여
둘 중 한쪽에 손을 쓰기 전에 다른 한쪽을 무찌르는 것이다.
이 방법으로 나폴레옹은  적보다 총병력수에서는 열세임에도 불구하고
각각의 상대방 전력에 대해서 숫적으로 우세한 병력을 집결시킬 수 있었다.
프랑스 혁명에 대하여 당시 유럽은 대프랑스 연합전선을 형성하였다.
유럽 지도를 보면 프랑스에 대해 영국, 스페인, 오스트리아, 프러시아, 러시아 등이 완전히 포위망을 형성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내선의 이점을 이용 -내선이라는 말의 의미를 어렵게 생각할 것은 없다. 프랑스의 위치를 보면 유럽의 어느 전장을 선택하여 갈 수 있는 위치이고 반대로 다른 나라는 서로 협조하기 위해서는 많은 거리를 필요로 했던 것이다.
바로 이런 프랑스의 지리적 조건이 내선 작전에 가장 적합했던 것이고 대 프랑스 동맹을 각개격파했던 것이다.
물론 이것만이 아니다. 내선 작전의 이점이 있다고 하나 본질적으로 적의 병력이 강대한 것은 사실이었으므로 내선 작전의 상대인 적국중 어느 것을 순서적으로 선택하느냐 의 문제도 매우 중요한 요소인데 나폴레옹의 탁월한 군사안은 이를 능히 해낸 것이다.
나폴레옹은 이러한 놀랍고 혁신적인 방식과 고도의 기동성, 그리고 대담성을 결합했으며, 이를 이용하여 프랑스에서 최고의 권력을 손에 넣을 수 있었고 나폴레옹 자신의 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다.
그러나 황제로서의 나폴레옹은 엄청난 규모의 군대와 자신의 군사적 재능을 과신한 나머지
더 이상 속도와 기습에 의존하지 않았고, 단순히 대규모 병력 혹은 공격력에 의지하여 승리를 얻으려 했다.
특히 1806년 예나에서 프러시아에 대승을 거두고 난후부터, 나폴레옹은 적을 전장으로 끌어낼 수만 있다면 언제든지 그들을 대파할 수 있다고 확신하였다.
때문에 그는 오로지 전투의 승리에만 관심을 가졌고 그는 이것을 그의 새로운 포병전술 로 해결하려 하였다.
그의 포병전술은 곧 엄청난 수의 포를 집중해서 적 전선의 선택된 한 지점에 집중 포격을 가하는 것이었다.
이 때부터 나폴레옹의 승리는 양측에 공히 불가피한 엄청난 희생의 댓가였다.
이제 자기 제국의 자원에 대한 사실상 무제한적인 권한으로 나폴레옹은 기만과 속임수로써 승리하려는 생각을 버렸던 것이다.
결국 이와 같은 방식은 손실이 너무 커져서 마침내 그의 적들은 약해진 나폴 레옹의 군대를 압도할 수 있게 되었다.
리델하트가 말했듯이 "그는 힘의 경제의 법칙을 어겼기 때문에 벌을 받았다. 그 법칙을 지키는 방법은 바로 기동성과 기습이다."

0
로그인 후 추천 또는 비추천하실 수 있습니다.
포인트 1,338
경험치 118
[레벨 1] - 진행률 59%
가입일
2013-05-11 07:36:22
서명
미입력

댓글목록1

마루밑다락방님의 댓글

profile_image
이 글 몬가 인기 많을듯..ㅋ 나폴레옹의 전술을 샅샅히 정리해놨으니..ㅋ
게시판 전체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