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마네 : 막스밀리안 황제의 처형
2014-08-06 17:42
15,302
2
0
-
- 첨부파일 : 4마네-막스밀리안%20황제의%20처형.jpg (101.5K) - 다운로드
본문
..
0
로그인 후 추천 또는 비추천하실 수 있습니다.
-
[마루밑다락방의 서고] 초승에 뜨는 달은 ‘초승달’이 옳다. 물론 이 단어는 ‘초생(初生)’과 ‘달’이 합성한 경우이나, 어원에서 멀어져 굳어진 경우 관용에 따라 쓴다는 원칙에 따라, ‘초승달’이 올바른 표현이다. 마치 ‘폐렴(肺炎), 가난(艱難)’ 등과도 같은 경우이다.2015-05-25
-
[인문학] 아일랜드... 예이츠의 고향. 가장 늦게 도달한 기독교(카톨릭)에 가장 심취하였고 중세 수도원 운동이 크게 부흥하여 역으로 대륙에까지 영향을 미쳤던 곳... 중국보다 성리학에 더 미쳤던 한국..자본주의의 실험재료가 되어, 자국의 식량이 부족하여 백성은 굶어죽는데도 영국으로 식량을 수출해야 했던 나라. 맬더스 인구론의 근거가 됐었고.. 영국의 식민지였으며 분단의 아픔을 격고 있는 나라.. 참 한국과 비슷한 점이 많은 나라입니다.2015-04-16
-
[인문학] 러셀... 현대의 소크라테스...2015-04-15
-
[인문학] 비극적이고 치명적인 대가를 치른 후였다.-------------전이겠지요.2015-04-09
-
[인문학] 신영복 교수... 진정 겸손한 글을 쓰는 분이지요.소외 당한 자, 시대의 약자들에 대한 이해가 깊은 분이고. 그들을 대변 또는 위로할 수 있는 몇 안되는 작가들 중의 하나이지요.2015-04-08
-
[인문학] 좋군요....2015-04-07
-
[인문학] 과학이 본연의 임무대로 오류들을 이리저리 쳐내가다 보니 알맹이가 하나도 안 남은 형국이되었습니다. 그러니 과학 때문에 목적을 상실했다는 말이 나왔고, 도구에 불과한 과학이 미움을 받는 묘한 지경이 되었습니다만... 그게 과학의 잘못은 아니지요. 만들어진 요리가 맛이 없는게 잘드는 칼의 잘못입니까? 재료가 형편없었던 까닭이지요.2015-04-05
-
[인문학] 물론 ‘목적 없는 세계’라는 아이디어가 ‘신앙의 부재’와 반드시 일치할 필요는 없겠지만, 어떤 목적으로 움직이는지 회의를 주는 세계는 신앙심을 약화시키는 무신론을 철저히 방조하고 있음엔 틀림없는 것 같다. -------------음... 아직 옛날 습관이 남아있는 어투이군요...전지전능의 무한자는 인간이 알 수 있는 대상이 아닙니다. 즉 불가지의 존재이지요. 이 불가지의 존재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있는지도 당연히 불가지입니다. 과학은 이 불가지의 세계를 다루지 않습니다. 그랫다가는 오컴에게 면도날로 난도질 당합니다. ㅋㅋㅋ2015-04-05
댓글목록2
마루밑다락방님의 댓글
멕시코혁명에 대해서는 뒤에서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멕시코가 1861년 스페인에서 해방되자 외채 지불 문제를 핑계삼아 제국주의 여러 나라가 무력 간섭을 시작했다. 특히 프랑스는 미국의 남북전쟁을 틈타 합스부르크 가의 막스밀리안을 멕시코의 괴뢰 황제로 세웠다. 이에 대해 멕시코 민족주의자들이 반발하고, 미국이 먼로주의를 내세워 프랑스군의 철수를 요구하자 막시밀리안 황제는 고립되고 체포되어 급기야 처형당했다.
마네의 이 그림은 처형 직후에 그려졌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상상으로 그렸기때문에 처형하는 군인들은 프랑스 군복을 입고 있다. 이는 어쩌면 그를 죽인 것은 프랑스라는 역사적 진실을 말하는 건 아닐까? 여하튼 이 그림은 나폴레옹의 위신을 떨어뜨린다는 이유로 발표되지 못했고, 그후 마네는 판화로 제작하여 발표하고자 했으나 역시 방해를 받았다. 그 작품이 대중에 공개된 것은 그림이 완성되고 32년 뒤, 뉴욕 전시회에서였다.
- 박홍규, <총칼을 거두고 평화를 그려라>중에서
마네의 "카드놀이"기법은 벨라스케스에게서 빌려온 것이다. 이것은 캔버스의 표면과 그림의 배경을 분리하지 않는 기법이다. 결국 마네는 작품을 순수 색면을 복원하면서, 회화는 무엇보다 먼저 회화여야 한다는 자신의 이상에 도달했다. 이 기법은 <피리부는 소년>에서 완성했다. 그는 서둘러 <막시밀리안 황제의 처형>에서 이 기법을 적용했다. 이 작품 역시 당대의 사건에서 주제를 취한 야심작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나폴레옹 3세는 분명한 이유를 들어 작품의 전시를 금했다. 이 작품에서 마네는 영감의 원천이 되어준 작품들과 유희를 벌였다. 고야의 <1808년 5월 3일>의 구도를 빌려오고, 고야의 <전쟁의 참화>에서 벽 너머로 처형 장면을 훔쳐보던 사람들의 얼굴을 가져와 덧붙였다. 그러나 마네가 그린 병사들은 표적에 명중시키려는 의지가 없어 보인다. 병사들은 화면과 평행을 이루며 총을 겨누고 있어, 전혀 희생자들을 위협하지 않는다. 마네는 이 효과가 무척 마음에 들었고, 이 기법을 전쟁을 그린 1870년 <내전(방어벽)>에서 되풀이했다.
- 질 네레, <에두아르 마네>중에서
[출처] <막스밀리안 황제의 처형>/에두아르 마네|작성자 굿럭
마루밑다락방님의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