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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온의 서고

[역사를 바꾼 인물 또는 사건] 왜구 5 : 공민왕 : 북방의 침입과 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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엎친데 덮친다더니...
섬나라 도둑놈들에게 한창 시달리고 있는 고려에 대륙의 도적놈들이 몰려들었다.

고려는 대륙의 정세가 심상치 않자 1357년에 김득배를 서북면홍두군왜적방어도지휘사로 삼아 홍건적의 침입에 나름 대비를 하였으나

1359년 12월 모거경이 4만 명의 홍건적 무리를 이끌고 쳐들어오자 별 효과가 없었다.

의주·정주,인주가 바로 함락되었고. 철주와 서경까지 무너지게 되었다.

하지만 육전에는 나름 노하우가 있는 고려인지라  다음해 1월에 서경을 탈환하였고  2월에는 정주·함종,안주·철주 등지에서 이 되놈들을 섬멸해 모두 압록강 이북으로 몰아낼 수 있었다.

그런데 이 잔당들이 해로를 이용해 풍주·봉주·안악·황주.안주 등 해안 지방에서 노략질을 일삼았다.

마적이 해적으로 바뀐 셈이다...쩝

이런 와중에 징그러운 왜구놈들이 또 쳐들어 왔다.

 

4월에 왜구는 경상남도 사천을 공격하고, 5월 경에는 전라북도 군산을 공격하였다.

이 해에는 전라 경상 지역에 가뭄이 심했다 하는데.. 

홍건적에, 가뭄에, 왜구까지.

공민왕.. 울고싶었을 것이다. 

왜구가 평택을 향해 공격해오자 개경은 또 비상 체제가 되었고

강화도를 공격당해 3백여명의 백성이 죽었고 쌀도 4만석이나 털렸다.

 

1361년에도 왜구놈들의 방문은 여지없이 이어졌다.

3월에는 현 남해군이, 4월에는 고성과 울산이 연이어 왜구에 털렸고

8월에는 부산, 양산,김해, 사천, 밀성....끝이 없었다.

 

이렇게 왜구들에게 정신없이 얻어터지고 있는 고려에 홍건적이 또 달려들었다.

10월에 반성·사유,·관선생·주원수 등이 10만의 거러지들를 이끌고 다시 고려를 침범한 것이다. 

대륙에서 쫓겨난 놈들이 고려에서는 펄펄 날아 삭주·이성·무주·안주를 박살내고 흥의역에 이르러 개경을 위협하였다.

이에 공민왕은 광주를 거쳐  안동으로 파천하였고 개경이 함락되었다. 

고려는 정세운을 총병관으로 삼아 적을 막게 하는 한편

각 도에서 20만 명의 군사를 소집하고 안우를 상원수로, 김득배를 도병마사로, 정휘를 동북면도지휘사로 삼아 반격을 개시하여 

다음 해 1월 개경에 진격해 적을 대파하고 관선생·사유 등을 잡아죽였다.

대륙에서 졌으면 그냥 거기서 죽을 일이지 고려까지 와서 되지는 것은 무슨 심뽀일까?

홍건적을 총력을 다해 몰아낸 고려에 왜구가 바로 들러붙었다.

2월에 악양현을 습격한 것이다.

7월에는 나하추가 수만의 군대를 이끌고 동북면으로 침입을 하였다... 고려는 완전히 동네북 신세였다.

나하추... 이 간나새끼는 이성계가 격퇴하였다.

 

1362년은 참으로 다사다난했으나 승리의 기쁨도 맛 본 나름대로 보람찬 한 해였고

고려 종결자 이성계가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해이기도 하다.

 

1363년 왜구는 교동에 나타났는데, 이때의 규모는 무려 213척이라는 어마어마한 수준이었다.

이에 개경은 또다시 비상계엄령이 내려지고 안우경을 왜적방어사로 임명하여 적을 대비하였는데

왜구는 개경을 치지 않고 현재의 경기도 김포시인 수안현을 공격했다.

괜히 육전에서 피흘릴 필요가 없었겠지...

 

1364년은 덕흥군과 최유의 침입으로 시작했다.

복수에 불타는 기황후의 후원을 받은 덕흥군과 최유가 1만여 군대를 이끌고 고려로 쳐들어 온 것이다.

이놈들은 최영과 이성계 등의 활약으로 해결할 수 있었으나, 

왜구의 침입에는 속수무책이었다.

3월, 왜구는 200여척의 대규모 함대를 갈도에 정박 시킨 후 하동, 고성, 사천, 김해, 밀성, 양주 등을 약탈하였는데

이로 인해 경상도 뿐만 아니라 전라도 지역도 왜구의 압력을 받아 조운선이 출발을 하지 못할 정도였다.

이에 공민왕은 교동·강화·동강·서강 등지의  싹싹 긁어모은 80여척의 배를 경기우도병마사 변광수와 좌도병마사 이선 등에게 맞겨 조운선을 호위하게 하였다.

나름 대규모의 군대를 지휘한 변광수와 이선은 대도 지역에 진입하였으나 왜구의 술수에 말려 박살나고 말았다.

변광수와 이선은 구경만 하다 도망쳤고 남은 병사들은 그대로 왜구의 칼밥이되었다.

이때 박성룡, 전승원, 김현, 이천생 등이 분투하였으나  대부분 물귀신 신세가 되었고 도망친 배는 20여척에 지나지 않았다.

교동, 강화, 동강, 서강 등지에서는 곡소리가 나지 않는 집이 없을 정도의 대패였으나 변광수, 이선 등은 처벌을 받지 않았다 한다...

이러한 대패에 당황한 고려 조정은 그동안 왜구를 상대로 제법 활약을 보여준 김횡을 전라도 도순어사로 삼았는데

이 인간이 막으라는 왜구는 안막고 군량미를 착복하고,조운선의 세미를  빼돌리고, 남의 과부나 약탈하는 짓을 일삼다가 왜구를 만나 병력 절반을 잃는다.

그래놓고는 승전했다고 사기를 쳐서 공민왕에게 술을 얻어먹었다고 하니 이 무슨 엽기란 말인가?

 

5월, 고려는 뜻밖의 대승을 거두었다.

경상도 도순문사로 나가있던 김속명이 진해현에서 3천여명의 왜구를 격파한 것이다.

이 김속명의 승리는 당시까지 왜구에 당하던 고려가 거둔 최대의 승리였다.

김속명이 승리를 거둔 후 노획한 무기들을 바치니 공민왕은 옷과 술과 금띠를 하사했으며 군사들에게는 전공에 따라 관작을 주었다고 한다.

공민왕.. 얼마나 기뻤을가?

하지만 이 정도 승리로 왜구의 준동을 억제할 수는 없었다.

6월에는 왜구가 해풍군을 공격했다.

 

1365년 3월 노국대장공주가 난산으로 죽었다.

공민왕의 상처에는 관심이 없는 왜구가 강화도 주변에서 계속 출몰했고 만사 귀찮은 공민왕은 최영에게 동강을 지키게 하였는데..  

고려 명장 최영은 술먹고 노느라  왜구들이 창릉에 침입하여 세조의 영정을 훔쳐가는 것을 막지 못했다.

공민왕은 화낼 힘도 없었는지 아니면 최영을 총애해서 그랬는지 그냥 혼만내고 계림윤으로 좌천시켰다.

상심한 공민왕은 개혁을 신돈에게 맡기고 자기는 2선으로 물러났고 전민변정도감이 설치되었다.

하지만 신돈이 개혁을 하건 공민왕이 칩거를 하건 왜구의 방문은 계속 이어졌다.

 

1366년에는 3월에는 왜구가 심악현을 공격했고 9월에는 양천현의 조운선이 약탈 당했다.

1367년 3월 경에는 왜구들이 강화도를 공격했다.

1368년은 간만에 왜구의 침입이 없었으나

1369년 11월에는 다시 영주·온수,예산,·면주의 조운선이 공격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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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5-11 07:3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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